‘순풍 산부인과’가 주는 기쁨과 슬픔
번역일을 시작한 뒤론 늦은 밤의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저녁 6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일을 하고 잠들기 전 왓챠에서 ‘순풍 산부인과’를 본다. 시간상 긴 영화를 보기에도 애매한데 에피소드 당 20분 정도라 딱 좋다. 너무 집중해서 볼 필요도 없고 웃긴 부분에서 깔깔대면 그만이다.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나에겐 하루의 당충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허다하고 김간과 사위 영규를 타박하면서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미를 보여주는 오지명을 중심으로 가족과 이웃사촌끼리 복작복작댄다. 여리지만 푼수끼가 다분한 용녀, 미선 부모의 구박에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생존법으로 아웅다웅하며 처가 살림에 잘 얹혀가는 백수 영규, 그런 영규지만 부부의 사랑으로 늘 감싸고 남편의 ‘편’이 되어주는 미선, 천연덕스러움으로 평생 먹고 살 것만 같은 뽀짝스러운 미달이. 첫째인 미선이 다음으로는 둘째 소연과 혜교가 있다. ‘순풍’의 의사인 소연이는 비교적 코믹함이 덜한 캐릭터지만 90년대 여성의 서울 말씨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송혜교가 아닌 발랄한 여대생 ‘오혜교’를 보고 있노라면, 송혜교라는 배우가 왜 그간 ‘가을동화’ 이후부터 슬프고 아련한 이미지에 소비되었는지 의구심을 품을 만큼 능청스러운 시트콤 연기를 펼친다. 미달이 친구 의찬이의 아빠이자 순풍의 의사이기도 한 이혼남 찬우. 그런 찬우 집에 세입자로 살며 마누라보다 더 집안일을 많이 해서 늘 서러운 코미디 방송작가 오중은 소연의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순풍의 김간과 표간, 중간에 하차한 장간(배우 고 장진영이 이 역할이었다), 이후 들어온 송간 등 감초들도 다양하게 출연하는데, 단연 쌍절곤을 날리며 지명에게 도전적으로 나오는 김간의 코믹 비중이 큰 편이고, 가끔 출연하는데 그 때마다 역할이 바뀌는 윤기원과 정웅인이야말로 순풍의 보는 재미를 배가하는 매우 비중 있는 존재들이다.
에피소드가 워낙 많아서 다 열거할 순 없겠지만 ‘순풍’이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한창 금 모으기를 하며 환난을 극복했던 IMF(97년 금융위기) 시기에 나와 유일하게 웃음을 줬던 시트콤이었다. 이때 많은 가구들이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해체에 이르는 경우도 많았고, 나 역시 같은 경우였다. 가족에 대한 즐겁고도 유쾌한 기억이 정확히 언제 끊긴 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이후였고, 고등학교에 들어서 독립적으로 완고해진 내 자아엔 ‘가족’이라는 단어를 상실한지 오래였다. 그래서인지 ‘순풍 산부인과’는 대리만족과 동시에 보고 나면 슬프기도 한, 나에게 있어는 웃픈 시트콤이다. 각자 다른 캐릭터의 대가족 구성원들이 복작복작, 아웅다웅 대면서도 그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삼시 세끼를 오손도손 함께한다. 가족이니까, 그리고 이웃사촌이니까 무수히 많은 해프닝(물론 시트콤이니 늘 상황은 주어지겠지만) 속에서도 한바탕 웃고 넘긴다. 가족주의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문득 ‘가족이니까’ 하는 말이 서글프게 가슴을 후빈다. 늦은 밤, ‘순풍 산부인과’를 매일 틀고 그들의 가족에 빠져든다. 현실 가족을 묻어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