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행복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서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일이 오면, 또 그다음 내일을 위해 살고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나중을 위해서 지금은 조금 참아라고 했다. 대학 가면 예쁜 옷 입을 수 있고. 연애를 할 수 도 있고, 편하게 여행을 갈 수도 있다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걸 지금 하면 왜 안되지? 예쁜 신발을 오늘 신으면 안 되는 거지? 내가 즐거운 것을 왜 오늘 하면 안 되지? 왜 오늘 잠을 충분히 자면 안 되지? 그 "나중"은 언젠데?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한국의 기성세대에게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을 떠나, 어느 정도 도덕적인 행동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들은 돈을 드리면 쓰지를 않았고, 좋은 옷을 사드리면 중요한 날 입겠다고 옷장에 넣어두었다. 내가 할머니께 웨지우드의 찻잔을 선물했을 때는 조건까지 붙였야 했다. "이거 손님 올 때 내려고 넣어 두지 마시고, 매일 할머니께서 커피 마실 때 쓰셔야 해요!"
앞에 놓인 마쉬멜로우를 먹지 않고 참았던 아이들이 커서 성공한다는 미국의 유명한 70년대 실험이 사실 연구 타당성이 떨어지는 질이 낮은 연구였다는 결과가 몇 년 전에 나오기도 했다. 타당성이 떨어진 다는 것은 연구가 도출 해 낸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오늘 고생하면 내일 행복할까, 아니면 오늘 행복한 사람이 내일도 행복할 확률이 높을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감정보다는 익숙한 감정을 찾기 마련이다. 평소에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 대학을 졸업했다고, 결혼을 했다고 갑자기 행복해질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좋은 감정보다 익숙한 감정을 느끼기를 원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해로운 연애를 반복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나는 한 때 유행했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인생은 한번뿐이니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며 지금 당장의 소비를 합당화 시키는 말로 많이 쓰인다.)를 외치는 삶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일 죽을지 모르니 오늘을 함부로 살아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10년 후에 나만큼 오늘의 나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의 행복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사실 내일의 행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병원에서 일하던 시절, 팀장으로 막 승진이 되었을 때, 리더십에 관한 워크숍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그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성공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행복한 뇌가 훨씬 더 정보를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진실성 있게 소통할 수 있게 하며, 조직을 더 잘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학생들의 뇌가 교육 환경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정보를 가장 잘 받아들이며,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억압받고 불안한 뇌는 지금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히 정신과 수업을 할 때는 나는 학생들과 충분히 교감하고 교육환경을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본다.
그러니까 나중에 행복하려고 오늘의 행복을 미룬다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자. 오늘 스스로에게 행복해도 괜찮다고 얘기해주자. "행복한지 괜찮은지 몰라서 안 행복하나? 아직은 xx (합격,취직,결혼,집구매 등) 를 못해서이지" 라고 한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진짜 그것때문인가 아니면 행복함을 느끼는 걸 사실 불편해하는 것인가?
"Regardless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스스로에게 허락해주자. 지금 오늘의 내가 가장 중요해도 된다고. 그러니까 오늘, 잠 푹 자고, 맛있는 거 먹고 (이왕이면 예쁜 접시에), 옆에 있는 사람들과 웃고, 햇빛 쬐고, 고이 넣어둔 예쁜 옷을 입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