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겨 죽어도 좋으니 한강특수여 오라
펜팔 일기 with 딸내미 4 : 독서 부흥을 꿈꾸며
놀라운 이야기 하나.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벌써 한달도 넘게 지났어.
쉽게 무슨무슨뽕에 잘 휩쓸리는 나지만 유독 그분의 수상소식에 지금껏 느꼈던 어떤 스포츠의 국위선양보다 오래 두근거렸던 것 같아. 나만 그런건가 싶어서 며칠 뒤 너한테 물어봤을 때 너도 똑같다고 하는걸 보고 역시나 싶었지.
작가님의 책이 100만부가 넘게 팔리면서 맛집도 아닌 책방에 사람들이 줄서있는 현상이 생기고, 대한민국 성인 연간 독서량이 4권도 안되는 현실에서 이제서야 책을 읽는척한다는 비판도 있었고, 이미 MZ 사이에서는 북스타그램 등이 남들과 차별화된다는 점에서 텍스트 힙 열풍이 불고 있다고도 하지.
벌써 8년여동안 독서모임을 하고, 요즘 특히 인력난을 겪고 있는 입장에서는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우선은 책 읽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가끔은 뭣하러 책을 읽나 싶을 때도 있어.
특히 유명하다는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아 단지 눈으로 예 이건 글입니다- 하고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듯 할 때. 이렇게 [안 읽히는데 / 안 와닿는데 / 어려운데 / 두꺼운데 / 맘에 안드는데] 베스트셀러라고? 나빼고 다 재밌어했다고? 세상이 나를 속이나? 지금까지 나름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던 내 자부심과 그 시간들이 허무해져. 그럴땐 비상약을 먹듯 허겁지겁 내 취향의 책을 찾아 역시 이거지-하지만.
여기에 더해 다 읽고 나서도 감을 잡을 수 없을 때, 심지어 분명 읽은 책인데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땐 책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자괴감이 더욱 심해져. 현명해지고 싶었던건데 어째 멍청함만 확인받는 느낌이야.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지금껏 읽은 책보다 앞으로 읽어야할 책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어쩐지 무겁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다섯번 좌절하더라도 한번쯤 얻게되는 그 즐거움 때문에 계속 책을 읽게 돼.
책다방도 한강특수가 필요한데
우리가 8년 넘게 애정을 가지고 참여하고있는 책다방에는 아직 한강특수가 오지 않은 모양이야. 아..직....
내가 몇년전 모임장을 맡으면서 기존 방식과 다르게 웬만한 역할을 다 분업화하고 내가 빠지더라도 전혀 영향이 없게끔 세팅해놓으니 큰 부담감이나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든든한 몇사람들이 나가고 기존 사람들도 참여에 소홀해지니 위기감이 왔어. 물론 기존 사람들로도 너무 잘 운영되고 있지만 유입없이 고여있는 조직은 썩기 마련이니, 운영방식의 문제인지 계속 고민이 돼. 멤버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용해서 오프라인 이벤트에 참여도 해보고, 홍보 루트도 다양화해보고, 종종 이벤트도 해보면서 게으르지 않게 운영해야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몇달 뒤에 또 육아휴직 들어갈 생각을 하니 더 조급함이 들기도 해. 지난 휴직 때 온라인으로 운영하면서도 굳건했던 모임인지라 크게 걱정은 안하지만서도 내 삶에서 책다방이 빠진다면 그 총맞은 가슴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 지 상상하기 어렵거든. 나를 위해서라도 독서모임에 더 열과 성을 다해야겠다. 그러려면 더 양질의 독서를 해야할 것 같아.
최근 독서방법을 바꿔봤어.
최근이라기엔 사실 어제부터인데, 한강작가님의 '희랍어시간'을 읽었거든. 부부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이라 읽은거긴하지만 어쩐지 작가님의 책은 기존에 내가 그랬듯 그냥 읽고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운거야. 이미 그렇게 작가님의 책 몇 권을 보내긴 했지만서도. 그래서 방치된 채 방전되어있던 태블릿을 충전하고 독서 폴더를 만들어서 책을 읽은 계기, 첫 소감, 모르는 단어, 인상깊은 문장, 심화학습 등으로 구분해서 수험생처럼 책을 파고들고 있어. 언제부턴가 새로운 걸 파악하는 게 귀찮고 지루했는데, 전부터 필요성을 느꼈고 결국 나의 발전으로 귀결될거라 생각하니 매우 신나게 하고있어. 태블릿을 실용적으로 쓰는 내 모습도 맘에 들고. 한달에 3~4권을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담갖지않고 찬찬히 해보려고.
한강 작가님의 '희랍어시간'의 모티브라는 아르헨티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어.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독서책에서 좋은 독서를 위해서는 양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까지 양질 중에서는 양에 집착했었어. 1년에 몇 권 읽었는지가 스스로에게 주는 성적표 같았거든. 여전히 포기할수는 없기에, 이제는 나만의 방식으로 쌓아가는 독서노트로 독서법을 다시 설계해보려고 해. 정말 온몸으로 읽었다라고 체감하고 싶어. 굳이 다시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럼 양과 질 모두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계획은 연말에 세워야 제 맛이지!
독서하는 삶에 네가 함께해서 정말 든든해.
우리가 같이 시작한 독서모임이지만, 설령 언젠가는 독서모임을 못하게 되거나 우리 삶에서 잠깐 독서가 후순위로 밀릴때가 오더라도 우린 책을 영영 놓지는 못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서로의 독서 취향을 알고 그로 인해 다른 재능과 취미까지 확장되는 풍요로운 삶을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게 정말 든든해.
우리가 하는 대화 중 8할은 영양가 없는 편이지만 그 기저에서는 항상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고 있고 나머지 건설적인 2할의 이야기는 지금껏 우리가 같이 쌓아온 서사가 없으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농밀한 것들이잖아.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더욱 달라질지라도 독서라는 매개체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서로 원하는 삶의 마중물이 되어주자. 지금 이렇게 서로한테 쓰는 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