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 일기 with 딸내미: 3. 일에 대하여
영원히 막내이고 싶은데, 아니 정확히는 막내보다 하나 윗단계 정도, 근데 벌써 앞보다 뒤에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는 우리의 직장생활이 벌써 약 10년차네. 우리는 칼취업이 되는 과를 칼졸업 후 같은 직종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는 큰 공통점이 있지만, 너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프로이직러고 나는 향후 30년간 이직할 생각이 없다는 게 또 큰 차이점이지. 게다가 일에서 흥미나 적성을 찾는지 유무에서도 우리는 다르더라고.
[싫다면서도 사실은]
매번 지겹지도 않고 출근하기 싫지만, 엄밀히 말하면 출근이라는 행위보다도 잠에서 깨어나 씻고 준비한 다음 내 소중한 집에서 나와야하는 그 과정이 싫은 거고, 실은 우리 둘 다 일이라는 행위 자체는 생각보다 할만하다며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아마 너도나도 직장에서 안맞는 사람도 겪어보고, 권태기도 느껴보고, 욕도 무진장 해봤다가, 월급날이 돌아오면 한번 뿌듯했다가, 중간에 쉬기도 해보면서 희노애락을 다 겪은 덕이겠지. 대부분 직장인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연차가 쌓이고 있는거겠지만 일한 지 10년이 다 되어보니 또 대부분이 그러진 않는다는 걸 최근에 몇 번 느꼈어. 나는 일과 직장이라는 것에 재미, 보람, 자기만족 등의 비중이 매우 적은데 반대로 이 부분의 가치를 제일 높게 두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있더라고. 이걸로 이직까지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받았을 정도야.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도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고 항상 한숨으로 마무리 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가 우물 안에 있었지뭐야. 너는 일에서 안정적이지만 더이상의 발전이 없는 상태를 위기라고 느끼고, 동시에 나는 그 부분을 안정이라 느끼는 게 참 신기했어. 네가 이직이 자유롭게 보장된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렇지않다면 앞의 이유로 이직을 하고싶다했을 때 솔직히 지지하지 못했을 거야. 너의 문제에 있어서는 손쉽고 공허한 응원보다 내 상황이라 생각하고 엄격 근엄 진지하게 생각했을테니. 좋든 싫든 내 안의 뿌리깊은 무사안일주의, 최우선 안전주의는 이 일을 하면서 점차 견고해지나봐.(엄마가 나한테 합격할 수만 있으면 독도라도 가서 일하라고 했던거 말했나)
[결국엔 일을 할 운명]
여하튼 이렇게 점점 견고해지는 우물 속 내가 독서모임에서 너를 비롯한, 일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새롭게 배우는 게 많아. 최근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임경선)'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같이 진행했었잖아. 너의 발제는 '나이들어 필요한 건 돈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 자신으로 잘 나이가 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였고, 나의 발제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에게 중요한 가치 3가지는 무엇인가.'였는데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의 두 발제에서 공통으로 염두해둔 답은 결국 '일'이었지. 여성으로서 몇십년동안 좋아하면서 동시에 잘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간 작가의 삶 그 자체가 다시금 내게 울림을 주더라. 책 제목처럼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결국 평생 어떤 형태든 일을 해야된다고 느꼈어.
[평생임에도 지겹지 않은 세 가지 이유]
처음 내가 회사에 들어왔을 때 이미 수십년간 회사를 다니셨던 분들은 나의 남은 30년이 벌써 지겹다고,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겠다고 하셨는데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실은 평생 일을 해야하는 삶이 그다지 지겹게 느껴지지는 않아.
첫번째 이유는 생계라서. 생계의 사전적 의미는 '살람을 살아 나갈 방도 또는 현재 살림을 살아가고있는 형편'이라고 하는데, 그 형편이 또래 평균보다는 매우 소소하지만* 큰 변동성 없이 꾸준하다는 점이 내 안정적인 성향과 잘 맞아서 좋아. 물론 더 큰 돈이 안정적으로 들어온다면 더욱 큰 안정감을 주겠지만 그건 따로 노력해야할 부분인 것 같고, 내가 살아있는 한 스스로 건사해야하는 나의 생계를 위해서는 뭐랄까 너무 당연하게도 태어났으니 하는 느낌. 매일 반복되는 루틴도 사실은 내게 안정감을 주는 요소 중 하나거든.
*진짜 얼마나 적은지 방금 찾아봤는데 워낙 소소하기로 유명한 직업이다보니 예상은 했으나 통계로 마주하니 충격이네.. 친구들아 이렇게 다들 잘사는거였어..? BTS가 껴있어서 그런거겠지..?
두번째 이유는 그 와중에 변화무쌍해서.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쟤도 그만두지 않는 조직이 가끔 막막하기도 하지만 별일이 없는 한 2~3년 안에 업무를 한번씩 바꾸거든. 그것도 하루 전에 알려주는 방식으로. 이렇게까지 스릴있을 필요는 없지만 평생 일할거니까 긴장풀지 말라는 장치로 받아들이는데 몇번 하니까 또 적응되더라고. 한달하면 눈에 익고 일년하면 몸에 익는 느낌. 그치만 인생에서 가장 큰 우선순위가 육아가 된 이후에는 더욱 안정적인 업무를 선호하게 되면서 앞으로 이 변화무쌍함이 긍정적인 시그널로 작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진짜 다이나믹한 업무를 맡았다가 3주를 3년처럼 느낀적도 있었기에. 그래도 또 지나보니까 추억이고 하루의 1/3인 8시간, 인생의 1/3인 40년 중에서 이정도 희노애락은 이벤트로 감수해야지 싶기도 하다.
마지막 이유는 결국엔 자기만족을 줘서. 뭐든 빨리 질리는 우리가 질리지도않고 자발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그 끝은 결국 자기만족같아. 내가 이걸 할 때 뿌듯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심지어 발전까지 할 때, 누가 말려도 하고싶잖아. 일도 아주 가끔이지만 그런 순간을 주더라고. 그런 감정은 보고서의 기승전결, 폰트, 완성도에서 올 때도 있고 업무적으로 누구보다 잘 숙지해서 술술 나오는 순간에서 올 때도 있고. 누구보다 만족시키기 어려운 나에게 인정받는 순간은 일하는 순간에 종종 오는 것 같아. 다른 누가 알아준다면 기쁨은 더 배가 되고.
[다른 일은 없을까?]
가끔은 이러한 특징을 기본으로 가지고 장점은 더 많고 단점은 더 적은, 나랑 더 잘 맞는 일이 있진 않을까 생각하기도 해. 그치만 결국은 다시 안정감으로 귀결되더라고. 현실의 평안함, 포기했을 때의 불안감, 도전했을 때의 희생해야할 것들 등을 생각하면 말이야. 이런 무사안일주의가 발전을 저해한다는 여러 비판이 있지만 발전은 책 읽고, 운동하고, 글 쓰면서 다른 방향으로 해보고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주는 장점(그놈의 안정감!)을 꾸준히 상기하면서 삼사십년 해보려고. 그 후 은퇴할 때가 되면 우린 또 무슨 일을 찾을까? 넌 그때도 흥미와 발전, 나는 그때도 안정일지 그 시기가 벌써 궁금하다. 내가 이렇게 일에 대해서 초연, 덤덤하게 썼지만 지금 맡은 업무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인 덕이 크니까 나중에 언제 그랬냐는 듯 온갖 육두문자로 화려하게 욕을 해도 언제나처럼 같이 화내주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