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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MARE May 30. 2023

세상 모든 거미줄에는 주인이 있다

연결된다는 것에 대한 애증

 여섯 다리만 건너면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는 6단계 분리 이론(Six degrees of separation)을 처음 접했을 때, 침범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가능성이 보이는 일임과 동시에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인연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할 수 없으므로. 그래서 원하지 않는 연결은 나를 결박하는 침범이자 공격이다.


 복도 저쪽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둘의 의견은 분명하게 갈린다. M씨가 얼마나 친절한데요, 글쎄요 일전에는 굉장히 냉정하던데,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합의를 볼 것이다. 평소엔 상냥하지만 피곤하면 차가워지는 사람, 뭐 그 정도로. 나는 친절해서는 안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냉정해서는 안되었던 것일까. 이렇게 나와 악연(惡緣)인 사람과 선연(善緣)인 사람의 연결은 나를 자기 검열하게 만든다. 혹은 나의 인격을 시험대에 올린다. 나와 악연인 사람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고립시키면, 그가 하는 내 험담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나는 나를 검열하고, 상대를 깎아내릴 방법을 상상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 간의 연결은 기회와 가능성이 아니라 침범자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인간관계는 아주 촘촘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거미줄에는 주인이 도사리고 있다. 관계를 주도하는 주류들이 바로 거미줄의 주인들이다. 오래된 거미줄의 주인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중학교 시절 여름, 주말 농구교실에서 함께 공놀이를 하던 동급생. 쾌활한 성품과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많은 아이들의 인기와 동경을 샀다. 하지만 그 멋진 아이는 종종 나의 옷자락을 당겨 귓가에 모욕적인 말들을 속삭였다. 조용한 악행을 고발하기는 어려웠고, 나는 무력했다. 짧은 여름이 끝나고, 그 아이와 나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게 되며 서로를 잊어갔다. 하지만 농구교실의 거미는 내 고교 친구의 SNS 계정에 다시 나타났다. 통하는 것이 많았던 친구였지만, 세 사람을 연결하는 거미줄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농구교실의 거미였다. 실제로 드러난 문제가 전혀 없었는데도, 두 사람의 친분 자체가 공격으로 느껴졌다. 나는 거미줄에서 도망치며 친구를 함께 도려냈다. 이번에도 나는 무력했다.


 사람들의 연결 관계를 알게 되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직장에서 나와 갈등이 있는 사람이, 나와 가까운 동료와 가벼운 인사만 해도 위축되곤 한다. 비슷한 이유로 SNS를 삭제하기도 했다. 나는 평생 거미줄의 주인, 관계의 주류가 되지는 못할 운명임을 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거미줄이 좋다. 얇고 가늘지라도, 일시적일지라도, 때로는 나를 배신해도, 좋은 인연에서 느껴지는 유대감과 영감이 좋다. 그래서 나는 선연은 충실히 누리고, 악연 앞에서는 충실히 비참해질 예정이다.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0km를 달린 후 목숨을 다한 아테네의 병사처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신나게 달려볼 것이다. 선연을 위해 악연을 견뎌내 볼 것이다.


 쉽게 끊어지는 만큼,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남는 것이 인연의 특성인 탓일까. 10년도 더 된 농구교실의 거미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치듯 이사를 갔다고 한다. 당시 끊어냈던 친구는, 성인이 된 후 우연히 연락이 닿아 몇 년간 다시 인연을 지속해 오다가 이젠 또다시 멀어져 버렸다. 그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과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을 때. 인연이 반복되면서 거미줄의 주인이 누구인가, 모호해졌음을 깨달았다. 농구교실의 거미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는 생각보다 힘이 없었다. 내가 힘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언제 어떻게 누구와 다시 만날지 모른다. 어떤 거미줄에 두 번째로 걸려들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된 거미줄은 제대로 된 주인이 없어서, 다시 걸려들더라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거미는 이미 죽었고, 우리는 이미 고통을 견디고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죽은 거미에게 힘을 부여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미줄도, 종내에는 오래된 거미줄이 되어 우리와 멀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거미가 두렵더라도, 그것이 곧 사라질 것임을 믿어보기로 한다. 사람들과의 연결을 두려워함과 동시에 사랑하면서 살아보기로 한다. 거미줄을 애증 하며 살아보기로 한다.


- 우리가 거미줄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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