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돼지, 소, 닭의 맛을 헛갈리기도 하고, 유제품이 상한 것을 모르고 먹었다가 탈이 나는 일도 잦다. 때문에 미식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 먹는 것은 큰 기쁨이다. 특히 많이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날이 종종 있다. 퇴근길에 작심하고 가게들을 들러 여러 가지 음식을 잔뜩 사들고 들어간다. 그렇게 세끼 정도에 먹을 양의 음식들을 식탁에 늘어놓고는 하나씩 해치우는 것이다. 중간에 더 못 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왠지 근성이 생겨서 결국은 다 먹어 치운다. 그렇게 먹고 나면 식곤증이 몰려와 금방 잠이 든다. 포만감에 취해 잠드는 것은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맛보다는 포만감 그 자체에 중독되어 있다.
나의 과식의 역사는 꽤 유서가 깊다. 입시 스트레스 탓인지 아니면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홍삼 탓인지는 몰라도, 고교생 시절에는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문득 포만감이 사라지면 공복감과 공허감이 밀려왔다. 포만감을 오래 누리기 위해 과식을 하게 되었다. 충실히 세끼를 챙겨 먹고, 쉬는 시간마다 간식을 챙겨 먹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한 끼를 더 먹었다. 다행히 수험생활이 끝남과 동시에 공복감과 공허감은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이미 포만감에 중독되어 있었다. 정신없는 대학생활 중, 나의 안식처는 야식이었다. 하루치 피곤을 포만감으로 보상받고자 했다. 저녁을 거르고 밤 10시가 넘어 야식을 먹고 바로 잠드는 일이 잦았다. 결국은 지독한 위염에 걸려, 똑바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다. 1주일 동안 응급실에 세 번이나 실려갔고, 회복하기까지 수많은 날들을 앉아서 잠들어야 했다. 단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나는 포만감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기를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배가 고파도, 먹지 않고 버텨보는 것이다. 힘이 빠지고 몽롱하지만, 작은 자극에는 크게 반응하는 예민한 상태가 된다. 곧 겨울잠에 들 곰처럼, 조금은 느릿하게 움직이며 생활해 보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 주었다. 조금은 게으르고, 나른하게 하루를 보내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부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고 했던가. 역으로, 먹지 않은 자에게는 일하라고 닦달할 수가 없는 거였다. 그렇게 나에게 쉼과 나태함을 허락하는 허기를 만끽하게 되었다.
신들의 저주를 받아, 먹어도 먹어도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된 에리식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전재산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팔아 음식을 장만했지만,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모두 먹어치울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는, 조금은 기괴한 결말의 신화. 에리식톤이 허기를 채우려고 발버둥 치는 대신, 허기를 만끽하며 침대에 누워 나른한 하루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그의 가족은, 그의 몸은, 세상에 남아있었을까.
욕망을 쫓는 삶과 결핍을 인정하고 안주하는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는 한다. 요즈음의 나는 결핍, 그러니까 허기를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 덜 먹고 덜 움직이는, 욕심을 내려놓은 적당히 나른한 날들이다. 평온하고, 나의 감정을 돌볼 수 있는 나날들이다. 하지만 언제 또 허기를 못 이기고 폭식을 해버릴지, 욕망에 사로잡힐지 모르겠다. 언제 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울지 모르겠다. 만약 나 역시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된 거라면 나는 지금까지 나를 얼마나 먹어치운 걸까? 에리식톤은 멈추지 못했다. 마지막에 그는 이빨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 욕망하는 데에서 오는 자기 파괴와, 쉼에서 오는 공허감으로부터, 나는,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잘 보전하고 보살피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 스스로를 먹어치우지 않도록 참고 있는 M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