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글
‘ 광야에서 무엇을’ 2022년 11월
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광야를 걸었을 때가 있었을까 하고 물어본다.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있었다. 어디가 광야일까? 광야에는 식당도 없고 집도 없다. 친구도 없다. 신발도 하나, 옷도 하나, 만약 더 있다 해도 하나 정도만 잉여가 있을까? 물도 충분히 없다.
왜 우리는 가끔 은유로 광야라는 표현을 쓸까? 그만큼 공급이 제한될 뿐 아니라 없다는 것이며 스스로 이룩한 무엇도 한 자리에서 누릴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집이 없다는 것은 나를 보호해 줄 벽이 없다는 것이다. 벽은 바람을 막고 지붕은 비와 눈을 막으며 모래 바람도 막아줄 것인데 하나도 없다. 광야에서 오래 머물면서 살기란 힘들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년 주야를 지나며 세 가지의 유혹을 이기신 것을 생각하면 쉽게 광야를 지나면서 무엇을 이기라고 나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난 그럴 자신도 없을뿐더러 일주일은 커녕 이틀이나 하루라도 무척 힘이 들 것이다.
부분적인 광야라도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서 그저 잠시를 지날 뿐이겠지만, 만약 그런다 하면 영혼은 기본 생존에 필요한 것만 내 안에 요구할 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나의 존재의 언어 한 둘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광야를 만나는 것과 부분 광야를 느끼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시기가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그렇다. 역설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복잡하기에 단순하고 결핍의 환경이 부르는 영혼의 자극 때문이다.
시야를 가리는 너무 많은 빌딩을 포함한 건축물들, 넘쳐나는 다양한 음식들, 차고 넘쳐 바퀴가 잘 굴러가지도 못하게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수납장이 모자라는 물건들과 그것들을 누릴 시간들, 시간이 부족할 정도의 만남들 등등 많고도 많다. 어떤 심리학 강사분의 최근 들은 강의에서 그는 관계 중독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의 망처럼 연결된 무수한 관계들! 다 필요할까? 모두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이전엔 그러지 못했지만 만약 내가 광야에 있다면 일단 물을 아끼고 먹을 것도 제한할 수밖에 없다. 햇빛이 뜨거울 때 가릴 팔이 긴 난방과 스카프, 발을 보호하는 밑창이 튼튼한 신발, 몸의 수분을 높여 놓고 고요한 마음을 가짐으로 마음의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는 기억의 창구를 활성화시켜야 할 것 같다. 결핍에 힘을 줄 수 있는 따뜻한 기억들과 긍정의 언어들! 바람도 피해야 한다.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배고플 때는? 목마를 때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러저러한 모든 방법을 넘어 더 근본은 인내가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인내의 훈련이 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인내 다음에는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을 감각할 수 있는 인지의 능력도 필요할 것 같다. 수로를 파악하고 수로 근처의 파장을 감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눈과 감각! 현대의 도심에 살면서 무뎌진 그런 나의 능력을 어떻게 가꾸어 둘 수 있을까?
다 취할 수 있으나 다 취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결핍을 불러 내 안에서 인내하면서 버틴다면 나는 나라는 인간의 극한의 제한을 필요할 때 조금씩 넘어 발휘할 수가 있을까? 깜깜한 밤에 하늘의 별의 움직임을 보고, 달의 변화를 보면서 토양을 진단할 수 있는 감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 겸손한 마음이 필요할까? 대담한 마음이 필요할까? 필요를 논하거나 방법론을 논하기에는 무엇이 ( 가진 것이 ) 광야에서는 너무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늘을 바라보며 그저 온전히 신께 의지하고 자연의 은총을 바라는 힘이 중요하다고 난 받아들인다. 신의 은총, 보호를 바라기에 길을 내도록 도우시는 전능하신 분의 도움을 믿고 바라는 마음, 받는 믿음과 순종! 그것을 배우고 경험하기 위하여 광야는 도구로서만 필요하구나. 왜냐하면 난 아무리 인내를 하더라도, 인지능력을 가지더라도 광야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너무 많은 도움이 있다. 소유가 있고 도구들이 있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물을 살 수 있고 기도하지 않아도 안전히 피할 집이 있다. 간절한 바람 없이도 공급이 온다. 신의 베풂의 손길을 느끼기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가끔 광야를 가야 한다. 순전하고 순수하고 온전한 바람을 자주 내 마음에 들이므로 영혼을 깨우쳐야 한다. 광야에서 나의 한계를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인내와 고양된 의지를 배우고 싶기에 쉬운 길보다는 바른 길로 가므로 가지게 되는 광야를 인정하자. 오늘도 모든 것에 자족하면서 넘치게 넉넉한 것들을 감사한다. 그럼에도 신께 온전히 의지하고 바라는 것을 배우는 내 영혼을 위하여 배낭 하나 들고 광야의 길을 닮은 여행길에 잠시 나서고 싶은 것이다. 아마, 분명히 충만해지고 깨어있는 영혼의 표정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