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왔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영화 또는 만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다급해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앙증맞기도 하고.. 곳곳의 분위기가 OTT 시청을 통해 매우 익숙해진 것들이다.
충전식 교통카드 스이카를 샀지만 이건 한동안 구입이 어려웠던 일종의 ‘레어템’ 구입 또는 확보 차원이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에 가지고 와서 쓸 계획으로 산 것이다. 이번엔 일정시간 지하철을 무제한 탈 수 있는 표를 사서 최대한 뽑아먹을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예약해 받은 QR코드를 도쿄 지하철역 자동판매기에 갖다 대기만 하면 표가 턱턱 찍혀 나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했다.
첫 식사는 시부야 ‘히키니쿠토코메’에서.. 최근 서울에도 지점을 낸 곳이다. 유튜버들이 꼭 예약해 가봐야 하는 맛집으로 입을 모으는 집. 다진 고기 세 덩이를 숯불에 구워 주고 갓 지은 밥을 무제한 제공하는 단순한 콘셉트의 식당이다. 완전 선착순으로 예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금요일 오전 9시에 다음 주 예약을 받는 것을 미리 알아 지난주 금요일 인터넷으로 예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할 수 없는 곳. 다분히 비밀스러운 위치에 자리 잡은 이 오묘한 식당은 우리 여행을 그야말로 최고로 장식해 주었다. 한마디로 맛있다. 고기 덩어리는 생각보다 조금 작았다는 아쉬움도 약간 있지만.. 더 먹고도 싶었지만, 맛집 가득한 도쿄에서 또 다음 장소를 기약하며..
보행신호가 들어올 때마다 장관을 이루는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 이 교차로를 조망하기 가장 좋다는 스타벅스 시부야 츠타야점은 최근 개보수를 마치고 다시 열었다는.. 예전에는 교차로 쪽 통창에 커피를 올려놓을 탁자가 ‘바’처럼 죽 이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탁자가 아예 없어지고 나무 걸상 몇 개만 앉을자리를 제공하는 가운데 다들 창가에 서서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마음껏 찍으라는 듯하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커피 마시며 사진 찍으며 보냈다.
예약시간에 맞춰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전망대 시부야스카이를 향했다. 하도 인기가 있어서 비행기표 사기 전에 시부야스카이부터 예약하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주경과 야경을 다 볼 수 있어 가장 인기 있는 일몰 전후 시간대는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어서 오후 8시 입장을 겨우 예약해 왔는데 이게 결국.. 날씨가 좋지 않으면 옥상 노천전망대를 열지 않는다. 우리가 건물 밑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옥상은 폐쇄상태였다. 그런데 우리 입장시간 직전 날씨가 급격히 호전돼 옥상이 기적적으로 열린 것이다. 사방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도쿄, 도쿄, 도쿄, 도쿄.
신주쿠로 돌아와 정감 어린 추억의 거리 오모이데요코초 그리고 드라마/영화 ‘심야식당’으로 유명한 골든가이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 또 와야겠다.
호텔 조식이 정갈하다. 일식과 양식이 적절하게 결합해 기본 이상을 잘 갖추었다. 혹자는 매일 메뉴가 똑같다고 불평을 하기도 한다는데 이 가격의 조식 뷔페가 뭘 더 바꾸고 자시고 할 게 있느냐는 게 내 생각. 점심, 저녁에 맛집 찾아다니려면 아침부터 너무 잘 먹어도 안 될 일이겠고..
도쿄역 근처 맛집에 이른바 오픈런을 하러 갈까 했으나, 배도 별로 고프지 않고 지하철 이용 동선이 의외로 불편하기도 해서 별도의 대안을 강구했다.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데 오전 날씨가 상당히 좋아서 일단 아사쿠사 구경을 가기로 했다.
아사쿠사역에서 내려 가미나리몬으로 가는 길에 인력거꾼들의 호객이 한창이었다. 난 원래 이런 일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인데, 아내는 매우 적극적이다. ‘30분에 만 엔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 누구의 뜻이었을까? 우리 부부는 순식간에 인력거 위에 앉았다.
젊은 인력거꾼은 곳곳을 설명하며 열심히 인력거를 끌었다. 속도가 느릴 뿐 차량 운행과 같은 방식이었다. 센소지 동쪽 어디쯤엔가에 인력거가 잠시 멈춰 섰다. 인력거꾼이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사진이 보통 잘 나오는 게 아니었다. 좀 더 달려 스미다 강변에서 스카이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번 더 찍었는데 이곳 역시.. 혼자 왔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지점. 결국 만 엔이 그리 과도하지 않다는 생각을 살짝 하게 되었다.
인력거에서 내려 가미나리몬, 나카미세도리, 센소지 순서로 일대를 죽 훑었다.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센소지를 품은 아사쿠사는 도쿄의 다른 지역과 달리 도시의 옛맛을 제대로 느끼게 하는 독특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오래전 혼자서 숙제하듯 둘러볼 때와 달리 아내와 함께 수학여행 온 듯 재미있게 경내를 둘러보았다.
그 좋던 날씨가 졸지에 바뀌어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긴자로 넘어와 초밥을 먹고 내린 커피를 마셨다. 초밥집은 세련된 고층건물 위층에 자리를 했고 커피숍은 긴자 거리가 잘 보이는 건물 3층에 위치를 해서 전망이 아주 좋았다. 창가의 푹신한 의자는 이용시간이 두 시간으로 제한돼 있었는데 정말 꼬박 두 시간 편안히 쉬다 가고 싶었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대중 의류 브랜드 매장이 12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그것도 도쿄 긴자의 그 값비싼 땅에서.. 대충 둘러만 보고 나오는 데 족히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 생맥주집, 44년 역사의 백년가게 ‘을지OB베어’의 단골이 일본에서 가장 오랜 맥줏집, 90년 전통의 ‘라이온 비어홀’을 찾았다. 몇 년 전부터 도쿄에 다시 오면 꼭 들러 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그 옛날부터 정통 독일 맥줏집 모습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곳. 독일 뮌헨에서 호프브로이하우스, 엥리셔 가르텐 키나 투름 비어가르텐을 함께 즐긴 아내와 오랜만에 또 오래 기억될 참 좋은 시간을 가졌다.
숙소에 돌아오기 전 오늘밤에도 오모이데요코초에 들렀다. 아내가 어젯밤에는 극구 싫다고 하더니 오늘은 손님 많은 집이 궁금하다며 애써 들어가서 일식 중화요리를 마음껏 즐기고 나왔다. 아예 내일 점심이나 저녁을 여기서 또 먹자고..
서울대 나온 아내가 와세다대학은 와세다역에서 가까워 좋겠다고 한다. 고대 나온 나는 학교와 지하철역 사이가 약간 먼 것 같다고.. ㅋㅋ
오늘 일정은 전적으로 아내가 짰다. 혹시 쇼핑을 할 거면 각기 다른 취향을 존중해 한동안 따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불사하기로 하고.. 그런데 전시회와 도서관 위주로 가닥을 잡은 아내의 선택이 꽤 구미를 당겨서 아내와 함께 와세다대학에 일단 같이 가기로 했다.
16년 만에 다시 찾은 와세다대학교. 고려대학교와 공고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고, 지난 주말에는 총장께서 개교 119주년을 맞은 고려대학교를 방문,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일도 있었다. 며칠 전 직접 뵈었던 분인데..
아내가 큰 관심을 가졌던 특별전시회는 예약이 되지 않아 갈 수 없었고,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 기념 도서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아내는 책을 좀 읽고 가자고 했다. ‘앗!’ 거역하기 어려워 적당한 책을 골라 보았다. 역본이 하도 다양해 ‘노르웨이의 숲’ 영문판을 찾는 데 시간이 살짝 걸렸다.
책을 읽기보다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자꾸 떠올려 보았다. ‘의식한다는 것?’ 그래도 이 와중에 고른 책이 꽤 재미있었다. 한 권 살까 싶기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다른 책을 흡족하게 읽은 아내가 ‘이제 가자’고 해서 아쉽게(ㅋ) 일어났다.
하라주쿠에 와서 먹은 좀 늦은 점심. 지하철역 출입구 바로 앞에 이치란 라멘집이 보이기에 그대로 대기줄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치란 라멘을 후쿠오카 밖에서 먹으면 왜 늘 본산인 후쿠오카만 못할까?’ 당연한 일인가?
결국 아내와 갈라서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만.. 아내는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쪽에 남고 나는 아키하바라를 향했다.
지난 세기말만 해도 최첨단 전자제품을 보기 위해 도쿄에 오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곤 했던 아키하바라. 세월이 많이 흘러 분위기가 정말 예상과 많이 달랐다. 이번엔 급식 우유 배달할 때 쓸 것 같은 플라스틱 상자 안에 중고 똑딱이 카메라를 잔뜩 담아 놓은 것을 잠시 들여다본 게 고작이었나? 금방 지하철을 다시 타고 다른 곳을 향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도쿄역. 역은 참 볼만한데 살짝 외딴섬 같아서 근처 다른 곳 구경을 이어서 하기가 좀 어려워 보였다. ‘그냥 아내랑 같이 있을 걸 그랬나?’ 그래도 이쪽저쪽에서 사진을 찍어가며 나름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식사 시간을 앞두고 아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신주쿠로 돌아왔다. 좀 일찍 와서 나고야에서 시작된 커피숍 ‘코메다’에 들어왔다. 나고야가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인연이 깊은 곳인지라.. 커피와 함께 따뜻한 빵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시로노와-르’를 먹고 싶었지만, 곧 저녁을 먹어야 해서 커피 한 잔만.. 코메다에서 스이카 카드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저녁 메뉴는 츠케멘. 연거푸 국수를 먹는 데 따르는 부담이 없지 않지만, 한국에서도 츠케멘을 즐겨 먹는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꼭 먹고 싶었기 때문에..
오늘 저녁도 역시 대성공. 아내도 나도 대만족이었다. 그리고 오늘밤에도 오모이데요코초, 추억의 거리로..
추억이 되어간다.
구글맵에서 ’너의 이름은 계단‘을 검색하면 마루노우치센 요츠야산초메역 근처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숙소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아침 먹고 제법 서둘러 나갔더니 꽤 한적한 마을 안쪽의 계단을 이내 찾을 수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
프랑스에서 왔다는 청년? 소년? 내내 큰 헤드폰을 쓰고 있는 것이 계단이 나오는 장면의 사운드트랙을 반복해 듣고 있는 듯했다. 얘기를 나눠 보니 내일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계단 위 스가신사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돌아 나오는 길, 불과 일이십 분 사이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이제 줄을 서야만 했다. 우린 이미 상당량을 찍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마을에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조심해야 했다. 북촌 한옥마을을 생각했다.
신주쿠로 돌아와 어제 혼자 찾았던 코메다에서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코메다의 자랑인 시로노와-르와 함께.. 도쿄의 중심에서 나고야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늦지 않게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숙소에서 가방을 끌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역에 빨리 와서 예약한 열차의 앞차가 플랫폼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친절한 역무원께서 표를 바꿔 주신 덕택에 애매한 대기시간 없이 공항에 가게 되었다.
창밖에 스카이트리가 보인다. ‘도쿄 안녕!’
일정시간 지하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서브웨이 티켓. 정확히는 따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본전을 뽑은 느낌이다. 구글맵으로 경로 검색을 하면 이 티켓으로 이용할 수 없는 JR 노선이 우선 검색되는 게 살짝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번만큼 여러 번 지하철을 탈 게 아니라면, 다음에 또 와서는 이번에 구입한 스이카 카드 같은 것을 충전해 가며 쓰는 게 합리적이겠다고 생각한다. 탈 때마다 표를 사는 불편이 없기는 마찬가지고 JR 이용도 가능하니..
eSIM 이용은 또 매우 성공적. 가격 경쟁력도 월등하고 편의성 또한 뛰어나서 앞으로 계속 쓰게 될 듯. 내가 인터넷 사용을 많이 한다고 생각해 데이터 용량 큰 제품을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내 사용량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더라는 사실. 이용시간이 길어도 동영상 말고 텍스트나 사진 위주로 쓰다 보니 사용량 자체는 적은 듯하다. 다음부터는 1G 정도 줄여 구매해야겠다. 첫 구매에 할인을 많이 받아 이번의 경우 딱히 큰 손해는 없다. 몇 주 안에 일본에 다시 가면 이어서 1.31 GB를 더 쓸 수 있기도 하다.
도쿄에 다시 올 때는 동쪽 구도심 쪽으로 가볼까 생각했는데 취소다. 매일밤 방문했던 정겨운 포장마차촌(?) 오모이데요코초. 사람들이 마구 몰려 자리가 없다가도 일정시간이 되면 신주쿠에서 잘 사람만 남고 지하철 끊기기 전에 적잖이 빠져나가는 것을 본다. 심심할 틈이 없고 오모이데요코초가 있는 신주쿠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