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프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은 없습니다.
드라마 <닥터슬럼프 2화 중에서>
친정으로 향하는 srt를 타고 있었다.
새 학기를 목전에 둔 긴장감과 뭔가 준비가 덜 된듯한 찜찜함에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이번 공휴일과 주말도 반납하고 출근해서 준비해야 했던 게 아닐까?' 의미 없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지난 설명절, 연휴 후반부가 짧아 친정을 가지 못했다. 아직 친정부모님께 새해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데다 학기가 시작되면 더 바빠질 테니 이번 친정행을 미룰 수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힘들게 구한 표였던가!
서울에서 여수! 이번엔 한 달 전, 예매가능 열차표가 뜨자마자 예약해서 겨우 집 가까운 수서에서 한 번에 가는 srt표를 잡을 수 있었다. 요즘 여수가 핫플레이스가 되면서 친정 한번 가는 데 명절표 구하듯 온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 이걸 놓쳐 자차를 이용하면 공휴일 낀 주말이라 최소 5~6시간쯤은 걸렸을 거고 버스도 전용차로를 타도 4시간 반에서 5시간 정도는 도로에 버릴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아무튼 답 없는 초조함을 애써 눌러보고자 ott드라마를 뒤적였다. <닥터슬럼프>를 선택해 1.25배로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드라마를 제 속도로 보는 게 속 터지기 시작했다. 워킹맘의 바쁜 일상에 여유 있는 드라마 감상은 사치였기에 어느 정도 감정이입은 되면서도 속도감 있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나마도 결코 드라마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집에서는 주로 설거지하거나 나갈 준비를 하면서 보고 오늘은 교실 환경에 쓸 꽃송이들을 오려대면서였다.
연속된 가위질에 눌린 중지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쯤 내 가슴을 흔든 대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아프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교수임용을 위해 실력도 없고 성품도 나쁜 지도교수의 온갖 갑질과 횡포에 침묵했던 여주가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때 때마침 또 마주하게 된 거지 같은 상황에 각성하고 교수를 한방 먹인 뒤 속 시원하게 할 말 다하고 마지막에 이 말을 던진다. 그러고는 의사가운과 명찰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당당히 나간다.
저거다! 나한테 필요한 것도 저거다!
더 이상 부당한 일에 나를 갈아 넣으며 어리석게 살지 않아야겠다. 난 이미 충분히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할 것이다. 그 이상으로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야겠다. 내가 스스로 몰아세우며 힘겹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봤자 그들은 인정과 보상이 아닌 더 큰 요구를 더 당당히 할 뿐이다. 아무 실속 없는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라는 말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사탕발림일 뿐이다. 언제부턴가 일은 열심히 하는 사람만, 거절하지 못하는 좋은 말로는 착한 사람! 속된 말로 우유부단 호구인 사람이 몰빵으로 맡는다.
호구하지 말자!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자!
올해도 이미 망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하고픈 말하며 살자! 절대 나를 아프게 하면서까지 지킬 일은 없다는 거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