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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콩새 Feb 18. 2021

파출부로 만난 여교수 - 한국행 길을 열어주다

여의사가 파출부된 사연


아래에 전편을 게재합니다.


https://brunch.co.kr/@hee91801/42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남자 교수님 댁에서 계속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남자 교수님이 다른 대학교의 여교수님께 저를 소해 개 주신 덕에 일자리를 잘리지 않은 수평이동으로 여교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교수님은 서울의 모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나이가 저보다 3살 아래였고 5살 되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북경의 모 대학교에 나와 있었습니다. 남편도 같은 대학교 교수였는데 나올 상황이 아니어서 함께 생활할 수 없었지만 낯선 외국생활에 어린아이까지 있었으니 조금은 일손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파출부 자격으로서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남자 교수님 댁과 크게 다른 부분은 없지만 5살 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함께 놀아주는 일이 추가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이는 중국 어린이 집에 다니고 있었고 베이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여교수는 중국 어린이집과의 소통이 어려워 "조선족"이었던 저를 고용하였지만 저도 사실 중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여교수님이 실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안~






여교수님 집에서의 삶은 이전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간단하게 면접을 마치고 여교수는 저한테 숙식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여교수님 댁은 남 교수님 댁과는 2시간 정도 거리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근처의 다른 주거지( 거처 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싶네요~ ㅎㅎ)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교수님 댁 가까운 대학가에 미리 봐 둔 곳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함께 가보자고 하시는 것이었어요.


작은 방 한 칸에 겨우 침대 하나 들여놓을 공간, 그리고 공동수도, 공동주방, 공동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복도식으로 된 하모니카 음계 같은 공간입니다. 저한테는 이곳도 감지덕지지만(일단 먼저 있던 곳보다 추위는 덜할 것 같았어요. 물론 여름에는 무지하게 더울 것이지만요~) 한국 여교수님은 순간 당황하시는 것 같았어요.


한참 서있다 하시는 말씀.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함께 지내실래요?" " 예???" 정말 제 귀를 의심했고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함께요?"  놀라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덥석 대답하기에도 걱정이 앞섰습니다. 


파출부로 일하는 조선족 아주머니들을 통해서 한국 여성들 굉장히 까탈스럽고 꼬장꼬장해서 비위 맞추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던 터이기도 했고 또 일반적으로 여교수라고 하면 가질 수 있는 선입견도 있었죠. 잠깐 망설이는 사이 여교수는 집세도 절약하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서 나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대학교 교수사택 중에서도 외국인 교수들 사택이라 매우 깔끔했고 뒤 마당에 작은 정원도 있었고 다른 외국인 교수들도 지나다니는 모습이 저한테는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냥 막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싶지만 제가 저를 알고 있잖아요. 음식도 잘할 줄 모르는데(저의 정말 큰 핸디캡이죠. ㅎㅎ) 이렇게 아늑하고 좋은 곳에 있다가 나중에 이곳에서 다시 쫓겨나게 되면 비참함이 더 커질 것 같았거든요. 


한데 "겉볼 안"이라고. 이 여교수님의 말투, 인상, 손 동장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성품 같은 것이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막 대할 것 같지는 않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을 떠나(물론 북한에서부터 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네요) 지금까지 밑바닥 생활만 했지 이렇게 근사한 곳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하루를 살아도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쫓겨날 때는 쫓겨나더라도 있을 때까지 있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합니다. ~ㅎㅎ


침실 한 칸, 큰 거실 한 칸, 화장실 달린 크지도, 작지도 않는 아담한 공간이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여교수는 침실로 안내하더니 침대 두 개를 붙여놓으면서 이곳에서 아이랑 3명이서 함께 지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이라면 이렇게 하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그럴 수 있는 분도 계시겠지만 쉽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죠. 


여기에 덧붙여 집안에서 해야 할 상황들을 설명해주면서 하는 말 "자신이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날은 아줌마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자는 것이었어요. 누구는 앉아서 놀고 있고 누구는 일하고 하는 것은 같은 사람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고 자신이 마음이 불편해서 싫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이런 행운? 복? 이 저한테 떨어졌을까요?

어쩐 영문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저는이 행운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불안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침실에서 두 개의 침대를 붙여 놓았으니 한 침대를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상황이 저한테는 좋은 점도, 안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주거공간이 편안하고 출퇴근이 없고 따로 생활비가 지급되지 않는 것은 너무너무 고마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여성분들이 그러하시겠지만 저한테는 특히 중요한 화장실 사용하기가 매우 편합니다.  앞부분 다른 챕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중국의 공중화장실 사용해 보지 못하신 분들은 상상 이상의 불편함을 아마 생각도 못하실걸요.


다만 이 동거의 불편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너무 친밀해진다는 것입니다. 많은 걸 공유해야죠. 특히 저는 저의 삶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큰 걱정이었습니다. 동거에서 급 친밀감은 정석 아닌가요. 


나이가 비슷했던 우리 두 사람은 저녁이면 침대에 누워  삶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가치관에 대하여, 남성에 대하여, 여성에 대하여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영화 보면 영화 얘기, 책 읽으면 책 이야기, 지나가는 남자, 이웃에 거주하는 외국 남성교수에 대한 이야기 등등 우리들이 대화는 그 범위가 제약이 없었습니다. 여교수는 쇼핑을 하게 되면 슬리퍼 하나, 반바지 하나, 립스틱 하나 등 꼭 제 것까지 하나씩 더 사 오곤 했답니다.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장르불문의 모든 이야기를 다 나누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ㅎㅎㅎ


여교수가 출근하지 않을 때는 소파에 앉아 함께 수다 떨고 함께 공원 놀러 가곤 했죠. 

잊히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 해 북경의 한 호텔에서 한국의 모 화장품 회사에서 나와서 프로모션 행사를 했습니다. 이런 행사가 어떤 의미인지 저는 0.0001%도 모르고 있었는데 교수가 나한테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고, 좀 단정하게 입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조언까지요.  화장품도 공짜로 받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사교계에 데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북한에 있을 때, 소설에서 느꼈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막연하게 상상만 하고 있었던 사교장소가 이런 분위기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낯설기도 했고 굉장히 뻘쭘하기도 했지만 마음 놓고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이 매우 비참 함했습니다. 

나도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실 이런 장소에 당당하게 어울릴 수 있을 텐데, 꿔온 보리 짝처럼 수심 가득한 표정에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였습니다. 


 이때 여교수가 같은 교수들에게 저를 소개하더라고요.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시는 분이시라고요. 집안일도 봐주시고 아이도 돌봐주시고 하시는데 믿을만한 분이셔서 개인적으로 고마워하고 있다고요. 다른 분들이 저를 대단하게 바라보시던 눈빛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 눈빛은 저에 대한 개인적 신뢰보다는 그 여교수님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걸 알기 때문에 그분이 소개하는 저까지도 좋게 봐주셨겠지요.


어느 날 여교수가 저한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공부를 하셨으면 정말 잘하셨을 것 같은데 왜 공부를 하지 않았냐고요~ 하~~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신상에 대하여 궁금하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다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단어를 정말 사용하기 싫지만요, 실제와는 다른 말을 하니 거짓은 거짓이 겟죠)을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변 시골에서 살았는데 나는 공부에 취미가 있었지만 엄마가 정신병으로 많이 아프셔서 어릴 때부터 엄마를 돌 볼 수밖에 없어서 중학교도 겨우 졸업했다고요. 책 읽기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책을 많이 잃어서 들은풍월은 있지만 실지 학문적 지식 같은 건 배워본 적 없다고요. 엄마 치료비를 벌고 싶어서 한국으로 가려고 연변에서 돈을 많이 빌렸었는데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사기를 당하여 집에도 가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둘러댄 거죠. 


저도 거짓말이 쉽지 않아 표정에 어색함이 드러나있었을 텐데 여교수는 그것이 아마도 처지에 대한 비참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교수의 아쉬워하던 눈빛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나를 제대로 느낀 거구나 하는 생각으로  제 마음속에 얼마나 큰 감동이 차올랐는지 모릅니다.


이후 여교수는 저한테 노트북을 내놓으면서 출근할 때 과제를 주었습니다. "여기를 누르면 노트북이 켜지는 거고요, 여기를 누르면 꺼지는 거예요." 자신가 출근한 다음에 시간이 생기면 한 번씩 손에 익혀 보라고요. 저는 제 노트북 아들도 손대지 못하게 합니다. 여교수님 인격은 이 세상에 두 명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노트북 켜기, 끄기 부터 시작해서 타이핑 치는 법 등 조금씩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너무너무 감동적이지 않나요? 덕분에 저는 한국에 들어와서 정착 기관에서 진행했던 타이핑 경연에서 단연 1등으로 상금 200만 원을 받았던 뿌듯함도 있습니다. 지금도 타이핑 빠르고 정확하게 아주 잘 칩니다. 자판을 보지 않고 강의자의 얼굴만 보면서 그대로 받아칠 수 있거든요. 물론 요건 소소한 자뻑(아~~ 돌 던지지 마세요. ㅎ)이고요~ 

저는 여교수와 생활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공부를 많이 한 여박사는 매우 까탈스럽고 꼬장꼬장할 거라는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던 저 자신이  한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해야겠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나 스스로의 인격을 높이는 것이구나 하는 것도 체험했죠.

그렇게 겨울을 넘기고 봄이 지나 어느덧 여름이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7월입니다. 제 생일이 있는 달입니다. 생일날이었는데 교수가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더군요.

북한을 떠나 떠돌이 생활하면서 생일도 잊고 지낼 만큼 팍팍하게 살았었는데 갑자기 생일상을 받았습니다.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도 8월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겸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날 교수는 저한테 한 가지 제의? 상의?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한국에 가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있었던 여교수는 저한테 지금도 한국에 가고 싶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러면 자기가 한국에 가서 "초청장"을 보낼 테니 수속해 가지고 한국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한국에 있는 친척이 초청장 보내주면 크게 돈 들이지 않고도 한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거든요. ~  

이 여교수님 참~~ㅎㅎ


조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국에 데려오는 대신 저한테 자기 집에서 그냥 일 좀 봐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봐주면 아이를 한 명 더 낳고 싶다고요. 

이 제의 자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죠. 제가 중국 신분증이 없으니 대사관 비자를 받을 수도 없죠. 여권 자체를 만들 수 없으니까요.


저의 상황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며칠 동안 고민 많이 했습니다. 말을 하자니 남한 신분을 가지고 북한 신분을 가진 사람을 고용하고 자기 집에서 함께 생활했으니 본인도 당황할 것 같고, 또 남한에 가서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그냥 모르고 지내는 것이 여교수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마음속으로는 다 털어놓고 정말 그동안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후자를 택했습니다. 얼마 있으면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그때는 한국에서 남편 교수가 들어와서 함께 돌아가게 됩니다. 어느 날 저녁에 식사 후 맥주 한잔 하면서 드디어 저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북한, 탈북, 그리고 중국에서의 체포 과정을 비롯한 이곳에 오기까지의 상황에 대하여서요.


여교수는 눈물을 흘리더군요.

" 미리 말씀하시지요. 제가 좀 더 잘해드렸을 텐데요."
" 아니요,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혹시 교수님이 당황하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러웠어요. 지금까지 저한테 해주신 이 모든 것,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장 교수님 앞에서 저는 사람이었고. 인간이었습니다. "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한참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어쩐지 공부한 사람 같았어요. 너무 센스 있고 지적이셨고 영리하셨어요. 그래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어요. 공부를 아무것도 못했고 책만 읽었다면서 과연 가능할까 하고요.ㅎ"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울고 웃고 했답니다.





다음날 여교수는 학교에 갔다가 매우 매우 흥분된 얼굴을 하고 들어왔어요. 학교에 가서 탈북자 관련 뉴스들을 찾아봤었고 주변 교수들한테 물었었나 봐요.. 들어오자마자 인터넷으로 관련기사들을 찾아서 나한테 읽어보라고 하면서 어쩌면 한국 가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신이 한국에 가면 꼭 알아본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이 돌아간 이후는 시간이 되면 북경 어디 어디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이라는 곳을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요. 거기 가면 한국 관련 정보나 소식들을 들을 수 있으니 꼭 찾아서 가보라고요.
앞부분에 소개되었던 저의 한국문화원에서의 여러 상황들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거든요.


여교수는 한국에 돌아갔고 저는 한국문화원에서 한국 관련 모든 것을 싹쓸이하듯이 읽기 시작합니다.

여교수가 한국 가서 알아본다고 하기는 했지만 저로서는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쉽지도 않을뿐더러 그동안 그만큼 잘해주셨으면 됐지 더 이상 제가 뭘 더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한국으로 돌아간 지 2달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여교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실은 그동안 새터민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한국 와서 이곳저곳 알아보니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새터민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만나서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알아보았고, 중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친구가 알려주는 중개인을 찾아가서 만났고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다주는 것을 전제로 다짐받았다는 것,  자신이 중개인 비용은 지불한 테니 중개인 한테서 연락이 오면 지체 없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준비를 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아.. 이럴 때는 정말 소리 지르면서 방방 뛰어도 되는 상황인 거 맞죠? 그렇죠?

혼자서 울고 웃으며 난리 부르스를 떨었습니다. 


결국 이 여교수님이 중개인 비용을 지불하셨고 저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한국에 와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당연히 매우 매우 친하게 잘 지내고 있고요. ㅎㅎ

그때 5살 되었던 아이가 지금 대학생이 되었고요. ㅎㅎ 

교수님 댁에 있으면서 오며 가며 만났던 중국인 교수들, 한국인 교수들, 여교수님 지인들.. 지금 한국에 와서 같이 식사도 하고, 안부도 주고받고, 하면서 지냅니다. 교수님 한 분을 통해서 인연이 갈래갈래로 뻗어 갔어요. ㅎ


여교수는 저를 자신의 대학에서 특강 기회를 주었고 여교수의 남편도 지금은 다른 대학교 본부에서 일하시면서 저한테 특강을 맡기시는 등 고마운 인연으로 이어가고 있답니다.


처음에 저를 믿어주셨던 남자 교수님 아니었으면 여교수님을 만나지 못했겠죠. 남자 교수님은 남성이라는 부분 때문에 저한테 더 이상 친절을 베푸실 수는 없으셨겠지만 훌륭한 분께 저를 소개해 주셔서 남자 교수님께도 정말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우리 세 사람은 드디어 한자리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십수 년 전의 일들을 회상하는데 참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고마운 인연 오래도록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도 남자 교수님의 적극적인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우리 세 사람이 아주 오래간 만에 함께 만났습니다^^



맛있는 식사하고 흥미로운 대화들을 나누었죠.
남자 교수님이 저한테 책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셔서 브런치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된것이기도 하구요.




그날 지방에서 올라오신 남자 교수님께서 저를 위해 저녁식사 계산까지 하셨습니다. 

제가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벌써 미리 해놓으셨더라고요.

다음에는 제가 두 분을 근사하게 모시겠습니다.

두 분 이 교수님, 장 교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 참.

중요한 거 빠트렸어요.

교수님 댁에서 식사 준비는 잘했냐고요? 

당연히 잘 못했죠. 기본이 안 돼있는 이 꽝손이 어디 가겠습니까.

교수님이 아쉬워하셨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ㅎㅎ

그래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서로 잘 통했나 봅니다. 

교수님이 손해 많이 보신 거죠. 저 때문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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