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기 가득한 새벽 기온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주먹을 꼭 쥔 손바닥은 주머니에 넣지도 않았지만 땀으로 촉촉 합니다. 빠른 걸음에는 자신감 느껴지는 듯하지만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만으로도 나 자신이 얼마나 긴장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즐비하게 늘어선 아파트들 사이를 헤집고 겨우 한, 두 개의 불빛만이 인적을 느끼게 하는 어두운 현관문을 열고 빨리듯 들어갑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을 차분하게 누르며 "띵동~!"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직은 잠이 덜 깬듯한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누가 볼세라 다급히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부터 이 집에서 "파출부 아줌마"로 일하게 됩니다.
베이징의 한 대학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코리안 푸드"라는 이름으로 점심 도시락 배달을 하다가 대학교에서 요구하는 "위생증"때문에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나는 파출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망설이다가 지원하게 됩니다.
지원 당시 제가 망설였던 이유는 청소만 하는 거라면 몰라도 교수님 댁 식구들의 식단을 오로지 혼자 도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굉장히 컫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 일종의 두려움까지 가지고 있는 저는 과연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면접에서부터 떨어지지 않을까? 설사 합격한다고 해서 일하던 도중 잘리지 않을까? 그러면 얼마나 자존심 상할까. 아예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면접은 교수님 댁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의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중국 베이징 모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나와계신 남자 교수님은 18살의 딸과 15살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중학교 교사였는데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여의치 않아 남편과 아이들만 나와있게 된 것입니다. 면접전까지의 압박감이나 긴장감이 무색할정도로 면접은 간단히 끝났고 내일부터 일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은 집안 청소와 하루 3끼 식사, 그리고 아이들의 도시락을 챙기는 일이었습니다. 부인이 없는 집이라 입주는 할 수 없고 근처에 자취방을 정하고 출퇴근하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휴~~
쓸고 닦고 하면 청소는 그럭저럭 할 수 있는데 식사는 어떻게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물론 도시락 주문 판매할 때 어깨너머로 좀 배우기는 했지만 맛까지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오붓한 한집 식구의 입맛을 제대로 맞출 수 있는 자신감은 정말 없었습니다. 어른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까지 있어서 아이들의 눈치보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고 거기에 아이들이 매일 도시락을 준비해가지고 학교에 가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저는 엄마 없이 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까. 가능한 최선을 다해 불편함이 없이 돌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되더라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입맛이었습니다.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을 제가 만들어 주어야 하지만 그럴 재간이 저한테 없었던 거죠. 이런 저한테서 식사를 얻어먹어야 하는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불쌍했습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저한테 샌드위치를 먹고 싶으니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답변은 했지만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샌드위치라는 외래어도 처음 들었는데 만드는 것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라 쩔쩔 맬 정도로 당황했습니다.
북경의 모 처에는 파출부로 일하는 아줌마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자기가 고용된 주인집에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이 공간으로 돌아옵니다. 이러저러한 대화주제속에 주인집 흉보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물론 어떤 일을 하고 부부싸움은 어떻게 하고 아이들의 성향이나 교육상태는 어떠한지 등 모든 소문의 산생지이지요. 저는 그 공간에 끼어들기 싫어 늘 외톨이로 외롭게 있었습니다만 이제 드디어 파출부 아줌마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샌드위치에 대해 물어봐야 했고 만드는 방법은 어떤지 알아봐야 했거든요.
사진으로라도 샌드위치를 본 적이 없을정도로 샌드위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저는 만들 수 있는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아줌마들의 대화에 끼어들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자연스럽게 샌드위치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를 끌어갔습니다. 공개적으로 만들 줄 모르니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 조선족들은 한국에서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족 신분의 제가 그걸 모른다고 말하는 즉시 의아한 눈초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사실 당시 모른다고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듯합니다. 누구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는데 말이죠. 괜히 도둑놈 제 발 저린다는 느낌이었던 거죠. 제가. 하하 제가 어떻게 질문을 했고 어떤 답변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대충은 들었으니 결국은 대충의 샌드위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샌드위치를 본 적이 있다면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어떻게 만들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15살 중학생이 샌드위치를 받고는 성질을 팍~쓰면서 쓰레기 통에 집어던지던 상황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게 나네요. ㅎㅎㅎ
당시 많이 속상했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의학대학 7년이라는 과정을 우수하게 마치고 남들이 다 가고 싶어하는 내과, 소아과 입원실 의사, 의학연구소 연구사로의 과정까지 10여년을 의료인으로 살아왔던 내가, 주방에서의 일을 배워보지도 해보지도 못했던 내가 먹고 살려고 이런 굴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6살난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은 지금 이 시각 풀죽 한그릇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텐데. 그 아이를 살리고자 떠났던 걸음이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외국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럴거면 아이곁에라도 있을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야속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앞에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날 저녁 숙소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 비참함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온전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참을 울고나서 돌이켜 생각하니 주인짐 아이들에게도 미안함이 들더군요. 내가 좀 더 음식에 자신이 있어서 엄마 곁을 떠나 있는 이 아이들에게 가정식 같은 안정적이고 입맛에 맛는 식사를 제대로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주방에서의 능력이나 재능이 없는 나에게서 식사를 얻어먹어야 햐는 교수님이나 아이들에게 한없는 미안함. 고향에 있는 이 아이들의 엄마는 나보다 얼마나 더 애틋하고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을 하니 그런 제 자신도 한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늘 미안하고 늘 죄송스러운 마음에 늘 진심을 다하여 집안일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른인 교수님은 이해한다고 해도 아이들은 입맛에 민감하니 교수님도 아버지로서 어쩔 수 없으셨나 봅니다.
어느 날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저는 어떤 원망도 없었고 속상하지도 않았고 그냥 미안한 마음만 들더군요.
당시 교수님은 다른 대학에 교환교수로 나오신 여자 교수님께 저를 소개하셨습니다. ㅎ 사실 일면식도 없고 제 신상에 대한 아무러한 확신도 없었던 상태에서 저를 다른 교수님께 믿음으로 소개한다는 건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두 분 교수님들이 같은 전공이고 한국에서도 같은 학회에서 활동하셔서 서로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저를 떠맡기듯 소개하지는 않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나중에 남자 교수님 말씀이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제가 없을 때 가계부를 작성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되셨다고 하네요. 그걸 보면서 어쩐지 공부를 했던 사람이 아닐까. 무슨 사정이 있어서 지금 이곳에 있지만 믿음, 신뢰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래서 아는 여교수님께 보증 선다고 하면서 소개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저는 또 다른 집에서 파출부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한국에 와서 남자 교수님께 전화드렸습니다. 어느 대학교 어느 학과 교수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연구실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드렸죠. 그리고 저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고 북경에 있을 때 본의 아니게 신상에 대해 거짓말하게 되었다는 것도 사죄드렸답니다. 교수님께서 전화를 받으시다가 너무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고 하시더라고요. ㅎㅎ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얼마 전에 이 남자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정년 하셨고 그동안 쭉 제가 언론에 소개될 때마다 기뻤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의 18세 15세였던 따님, 아드님들도 이제 장성한 어른이 되었고 샌드위치를 집어던지던 아들은 장가들었다고 하시네요. 하하. 가족분들과 티브이를 보면서 제가 나올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오늘 저를 만나러 가니 함께 가자고 했더니 아들이 쑥스러워서 지금은 못 가겠고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하러 온다고 했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파출부로 일했을 때의 경험은 저에게 비참함이나 짜증이나 스트레스를 주었다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인생 막바지라는 말은 새로운 방향으로 유턴할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한 지붕 밑에 있고 성공의 옆방에 실패가 산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늘 같은 곳에 있고 차이라고 해봐야 한 끗 차이라는 말이겠지요. 지금의 상황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도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히 돌아보면 꼭 출로는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지금 내가 잡은 것이 비록 불행이라고 해도 곧 몸을 조금 틀면 한 지붕 밑에 함께 존재하는 행복도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들이 참 많았지만 참되고 진실된 마음, 포기하고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늘 내 곁에 있는 또 다른 행운이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