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겨우 보름 정도의 기간을 삐끼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 일이 어느덧 몸에 배어있었나 봅니다. 굳이 직업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민박에 손님을 모셔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언제든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가요? 새로 옮긴 민박집에서 지내면서 장 보러 다녀오던 어느 날 건물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어오는 폼이 숙박할 곳을 찾고 있는 듯한 한 남성을 보게 됩니다. 보름의 삐끼 생활이지만 제 눈썰미 장난 아님을 자뻑하며~ ㅎㅎㅎ
무작정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를 찾으시나요? 손에 들고 있는 종이쪽지를 들여다보니 어떤 민박집 주소가 적혀있었습니다. 아는 민박이냐고 물었더니 전혀 모르고 주소만 알고 찾아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하네요.
직업의식이 발동했던 저는 우리 집이 더 좋으니 집으로 가자고 무작정 이끌었습니다.
" 깨끗하고요. 밥도 맛있고요. 빨래도 해드리고요. 뭐든 다 해드립니다.!"
삐끼 역할 보름 동안 입에 착 달라붙도록 읊조렸던 멘트들을 속사포처럼 되뇌며 이 손님에게 써먹습니다. 캬~~
전 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미스터 강은 좀 특이한 손님이었습니다.
어떻게로든 설명이 되지 않는 묘한 느낌의 손님이었습니다.
강수창(물론 가명입니다.)이라는 이름과 함께 본인을 38살이라고 소개를 했고 중국을 경유해서 인도네시아 쪽으로 긴 여행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전에 중국어를 좀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학원에 등록하지도 않았고 과외선생을 두지도 않는 등 언어 습득을 위한 것에는돈을 쓰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없었습니다.
단지 민박집에 숙박하면서 짧은 대화를 중국어로 하는 등의 방법으로 중국어 공부를 대신하고 있었죠.
민박에 들어있는 다른 손님들이 저녁에는 맥주 마시러 가고 노래방 가고 하는 것에도 거의 어울리지 않았고 책을 읽거나 산책 정도만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멋지게,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하는 근사한 말이나 요란한 행동 같은 쇼맨십도 없는 정말 묘한 느낌의손님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냥 손님 정도로만 생각했다가 점차 한국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피신 온 사람 일가 하는 생각도 했었만 점차 그런 의심도 옅어지면서 그냥 성격이 좀 특이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정말 이 사람이 사기군이 아닐까 또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비슷한 나이 또래라 말이 꽤나 잘 통했습니다. 썸 타는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제 느낌으로는 이 남자가 민박집 다른 아주머니들한테 하지 않는 이야기를 나한테는 하는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거든요. 뭐 이건 그냥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 ㅎㅎ
그렇지만 나를 의심 들게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이메일 사건"입니다.
미스터 강이 하루는 이메일에 대해 이야기하더라고요.이메일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계 어디에 있던 자기가 있는 곳을 서로 연락해서 알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기입니까. 세계 어느 곳에 있는 걸 전화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또는 정신적으로 망상에 젖어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죠. 이메일 주소 하나가 그 사람을 대신하고 세계 그 어디에 있던 그 누구와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저는 사실 믿지 않았거든요.
믿을 수가 없었고 정말 허황하게 느껴졌습니다.
한, 두 달 머무르다 보니 민박집주인들과 가까워지게 되고 식구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새벽시장에 갈 때면 가끔 따라가서 짐도 들어주고 리어카도 끌어주고 하더군요. 민박집 15살 아들과도 재밌게 잘 놀고 중국말도 배우는 등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의 민박집에는 주인집 여자 사장님과 여자 사장님의 올케(밥하는 아주머니), 그리고 그 올케의 언니, 그리고 저까지 고정인원이 4명이었고 여기에 미스터 강 씨가 오래 숙박하다 보니 거의 식구처럼 있게 되었죠.
미스터 강과는 말은 잘 통했지만 신분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제가 자꾸 피하게 되더라고요.
당시 강 씨는 김현식 씨의 "내 사랑, 내 곁에"노래를 참 자주 불렀습니다. 저는 처음 그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거든요. 제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자연스럽게 노래를 자꾸 불러달라고 했었고 배우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김현식, 김광석의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거든요. 그때 배웠던 김광석 씨의 "일어나"는 제가 한국에 와서 정말 힘들 때 제가 무너지지 않고, 주저 않지 않으려고 하루에 50번 이상씩 들으면서 힘을 얻으려고 했던 노래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제가 자유로운 신분이었고 조금 적극적이었다면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만 당시의 저는 극도로 조심하는 긴장 모드였습니다.
저는 완벽한 중국 조선족 행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중국 조선족들과 다름없이 한국에 대해 조금은 아는 체해야 하기도 했으나 사실은 전혀 아는 것이 없어서 눈치껏 미스터 강과의 대화에 긴장해야 했죠.
미스터 강은 "마작"을 모르지만 호기심에 참석했고 그날 꽤 많은 돈을 잃은 걸로 압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제 느낌으로는 미스터 강이 놀음에서 잃은 돈이 저의 몇 개월치 월급인 걸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 돈을 잃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현이었고 제가 속상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 정도 가지고 무슨, 원래 놀음을 할 때는 어느 정도 돈을 잃을 거라는 각오는 하고 시작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그 사람이 멋져 보이는 것보다 처음으로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 돈을 벌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감정을 억누르고 육체를 혹사하며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남조선 사람한테는 이 돈이 아무것도 아닌 거구나 하는 마음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오래간만에, 정말 오래간만에 그동안의 참으면서 쌓여있던 여러 감정들이 겹치면서 정말 실컷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
그러던 어느 날,
민박집 사장과 밥하는 아주머니를 비롯하여 가족들끼리 수군수군하다가 갑자기 저를 부르더라고요.
말씀드렸던 밥하는 아줌마의 언니가 사정이 있어서 민박에 끼여 살고 있었는데요. 민박집 여사장이 여동생의 시누이가 되니 사돈집에 얹혀살고 있는 거죠. 매우 불편한 관계는 맞지 않나요? ㅎ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일거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북경시내의 모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 및 판매할 수 있는 일거리가 생기게 되었는데요.. 이것을 넘겨받는 비용이 당시의 인민페로 3.5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이 없어서 민박에 숙박하고 있는 미스터 강에게 빌려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미스터 강이라는 사람이 당신들한테는 빌려줄 수 없고 저한테는 빌려줄 수가 있다고 했다네요.
그래서 저보고 미스터 강에게 돈을 빌려서 그 장사를 같이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에 문외한이고 더군다나 음식을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인데 음식장사를~~ 그것도 돈이 없이 어떤 남자의 돈을 내 이름으로 빌려서?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입니까..
안된다고, 안된다고 손사래를 쳤죠. 나는 싫다고요. 전혀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요.
당시 저는 민박에서 월급을 받아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늘 돈이 필요했고 수중에는 늘 돈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민박집에서도 알고 있었고 미스터 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한테는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실 유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급여보다는 훨씬 많이 벌 것 같았거든요. ㅎㅎ
하지만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돈이라고는 빌려보적이 없는 저는 남의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매우 잘못된 행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의 돈을, 당시는 돈을 빌려주고 그걸 빌미로 이 사람들이 서로 모의 작당해서 저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해서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고, 게다가 빌려달라고 요청하지도 않는데 먼저 돈을 빌려준다고 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당연히 엄청난 후과가 뒤따를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은 그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느꼈던 미스터 강이라는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민박집에서 버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벌 수 있고 그것으로 가족들을 살 수 있다는 건 엄청 큰 유혹인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돈과 이성사이에서 판단력 시험대에 오르게 된 거죠.
이때 제 감정의 균형은 우유부단함보다는 결단력에 무게중심이 실려있었나 봅니다.~
까짓 거.. 어차피 떠돌아다니는 인생,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겠지, 일단 해보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보자.
그렇게 미스터 강과 저 사이에는 인민폐 3,500원에 대한 계약이 이루어졌고 이자는 받지 않겠지만 본전은 꼭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스터 강은 인도네시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렇게 생면부지의 저한테 3,500원을 주고 인도네시아로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다시 저한테 이메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죠. 자기의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면서 언제든 연락할 일 있으면 이곳으로 연락해라고요~
하지만 이메일이 뭔지도 모르고 이메일 할 줄도 몰랐던 저는 어떤 연락도 할 수 없었습니다. ㅎ
미스터 강은 3.500 원주고 떠난 후 다시 돌아온다고만 했지 언제쯤 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그야말로 바람처럼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무슨 영화 같지 않나요? 다시 생각해도 참 놀라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졸지에 북경에 있는모 대학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코리안 푸드"라는 이름을 걸고 도시락 장사를 하는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저한테 돈을 빌려주었으니 모든 회계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있었고 들어가는 돈, 나가는 돈, 이득으로 남은 돈은 밥하는 아줌마의 언니와 저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저는 식재료 준비하는 일을 하고 언니분이 주로 음식을 도맡아 하셨죠.
당시 북경의 모 대학에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계뿐 아니라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유럽계 학생들까지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학에는 저희가 하는 한국음식을 비롯하여 일본음식과 중국음식 등 3개의 음식 코너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음식을 만들어 용기에 담아가지고 학교 안에 들어가 팔기도 했고 주문받아서 만들어주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장사를 했었는데 생각보다 수요가 꽤 있었습니다. 대학에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도 많았고 그들도 저희 도시락을 배달해 먹고 있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라 늘 배가 고픈 듯 해보였고 치킨이라도 튀기는 날에는 한, 두 개씩 더 주기도 했고 혹시 도시락을 팔다가 몇 개씩 남으면 한국 학생들에게 들려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마음에는 북조선 아줌마가 남조선 학생들에게 만들어 주는 음식이라는 것, 그래서 남모르는 정성이 정말 많이 들어있다는 것에 마음속으로 혼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 가운데는 아주 훤칠했던 "원"씨 성을 가진 학생(이름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이 있었는데 저와 조금은 더 살갑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 글을 언제인가 그가 본다면 저를 기억하고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재미나게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음식 하는 곳은 의례히 그렇듯이 대학에서 "위생증"이라는 걸 요구하더라고요. 보건소에 가서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발급받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파출소에 가서 인증을 받아와야 하는 거죠. 당시 제가 가지고 있는 위조 신분증으로는 파출소에 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되고 저는 빌렸던 3.500원을 가지고 다른 일자리를 찾게 됩니다.
현금 3.500원을 빌려주고 홀연히 사라진 미스터 강은 이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민박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 전화할 법도 하지만 딱 한번 장사는 잘되고 있는지 하고 전화 왔고 이후 감감무소식입니다. 이메일 주소라는 것을 적어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 저한테는 무용지물이었죠.
새로운 일자리(다음 기회에 할게요^^)를 찾아서 자리를 옮긴 저는 제가 있는 곳의 전화번호를 민박집 사장에게 남겨놓고 다시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새로운 일자리를 두 번 옮겼던 어느 날 민박집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고 미스터 강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하하. 이 사람이 돌아왔네요. 하하하
참 재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죠.
우선 반가웠고 꼭꼭 간수하고 있었던 원금 3.500원에 내 나름대로 이자라고 생각하고 500원 얹어서 4,000원을 돌려주었답니다. 웃더군요. 이 돈이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이렇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오랜 시간 연락도 없이 있었는데 이걸 간수하고 기다렸다는 것이 참 놀랍고 대단하다고 민망한 칭찬, 칭찬 퍼레이드를 쏟아냅니다.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믿음을 지켜냈다는 뿌듯함도 컸습니다.
사실 그냥 가지고 어디로 튈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돈이 궁했고 돈이 필요했던 제가. 하하
하지만 믿음이나 신용은 몸에 배지 않으면 타인들이 반드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엄마가 늘 말씀하셨죠. 순간의 이익을 좇지 말고 늘 미래를 보고 현명하고 지혜롭게 선택하라고요. 지금은 아쉬움이 남아도 나중에 더 큰 이득으로 너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요.
그걸 가지고 튀었다면 단돈 3,500에 양심을 팔고 평생 마음속에 부끄러움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게 될 거고 무엇보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저한테 닥쳐오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민망한 칭찬이었지만 그 칭찬이 싫지 않았습니다. 알아봐 주고 칭찬해주는 것에 고마웠고 그 돈을 잘 지켜낸 자신에게도 감사했습니다.
미스터 강은 이 돈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미 이 돈은 남아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계획 바깥에 있는 돈이며 지금 나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많이 산 삶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저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굉장히 기쁘다고 하면서 말이죠. 뭐 어쨌든 저는 돈을 다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 거냐. 다시 장사를 할 거냐고 미스터 강이 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미스터 강의 성격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도 않았기에 저는 드디어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요. 하하하 제가 평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족이라고 말하고는 있는데 중국에 대해서도 한국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대답을 회피한다든가 하는 등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고 그 사람도 느꼈던 거죠.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생각만했지 차마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 못 했다고 하네요. 조금은 어설프기는 했지만 저한테서 진심이나 순수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돈을 저한테 빌려준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미스터 강이 싫지는 않았지만 당시 우리 두 사람은 모두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차츰 들었던 생각이지만 미스터 강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느 사람들과 좀 달랐던 것이 그래서였구나 하는 생각도 나중에 하게 되었거든요.
지금 대로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은 썸 타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썸인 듯 썸이 아닌 그런 썸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도 좀 더 적극적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북한 사람이라는 제 솔직함이 굉장히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제가 또 피하는 상황으로 갔을 수도 있었구요.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동안 어디에도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가여운 처지에 쌓여있었던 스트레스를 토해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으로 그 남자로 부터 저를 지켜내기 위한 방어수단으로 이용했던것도 있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도 제 마음을 컨트롤 하기 힘들 것 같았고 그 사람에게도 판단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서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을 마음에 간직한 채 헤어집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아.... 브런치 미워요. 이런 사생활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거든요. 어머어머 분위기에 취해 이게 뭔 일인가요?
나중에 이 이야기는 미스터 강이 보게 된다면 삭제해달라 할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이후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저는 한국으로 들어왔고 이메일 하는 법을 배웠었던 저는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미스터 강에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내가 이제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요.
바로 메일로 연락처가 전해져 왔고 통화를 하게 되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만남을 약속하고 날짜를 정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