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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즉문즉설] 4. 아들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

죄책감에서 자비로 가는 길

by 이안

질문) “저는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군인이 된 큰아들이 중학생이던 시절,

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주 매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매를 들어야 아이가 바르게 자란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인성적으로 미숙해서,

화가 많고 판단이 서툴렀습니다.

그 결과, 아들과의 관계가 틀어졌고

그 일로 가족과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가족과 연락조차 하지 못한 채 혼자 살았습니다.

이젠 세월이 흘러 명절이면 잠깐씩 아들을 만나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큽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어린 시절 가장 믿었던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은

아들이 걱정됩니다.”


대답) 이 이야기는 죄의 고백이자 사랑의 고백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그 마음,

그게 바로 속죄의 시작이고 자비의 출발점입니다.

당신은 이미 깨달음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참회(懺悔)’를 단순히 “잘못을 뉘우친다”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알아차린다”라고 풉니다.


《대승의론》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죄를 알되, 그 근원을 보라.

그 근원이 사라질 때 죄도 사라진다.”


당신이 그 시절 아들을 때렸던 이유는

‘아이를 바로 키우겠다’는 욕심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

‘통제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다’는 불신.

그 두려움이 분노의 옷을 입고 나온 겁니다.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는 불보다 빠르게 자신을 태운다.

그 불을 다스리는 이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다.”


당신은 이제 그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죄책감의 재를 손에 쥐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죄는 붙잡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를 ‘보고 놓을 때’ 비로소 정화됩니다.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부모의 후회와 죄책감은,

실은 “이제라도 회복하고 싶다”는 사랑의 신호입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막혀 있다는 거예요.


죄책감은 과거를 잡아당기고,

사랑은 미래로 향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잘못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질문)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저를 경계합니다.

명절에 만나도 어색하고, 제 눈을 피합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 아이는 당신을 두려워했던 시간이 더 깁니다.

그 두려움은 ‘기억’이 아니라 ‘몸의 반응’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당신의 사랑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유마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 익을 때 연꽃이 피나니,

조급한 마음은 향기를 흩트린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서두름이 아니라 머묾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아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그저 조용히 곁에 서 있을 때

그 침묵이 오히려 진심을 전합니다.


질문) 그럼 지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내가 그 시절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진심으로 써보세요.

편지를 쓰되, 용서를 구하려 하지 말고

그때의 당신이 얼마나 미숙하고 두려웠는지,

그럼에도 아이를 사랑했음을 담담히 적으세요.


그 편지는 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쓰는 과정 자체가 참회의 수행이 됩니다.


둘째, 아들의 현재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세요.

그가 군인이 되어 꿋꿋이 살아가는 건

당신이 준 상처를 딛고 스스로 일어선 증거입니다.

그가 강해진 건, 당신의 매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낸 의지 덕분이에요.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존중하세요.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형태입니다.


셋째, 스스로에게도 자비를 베푸세요.

“나는 나쁜 아버지다.”라는 생각은

또 다른 폭력입니다.

불교에서 자비(慈悲)는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향해야 합니다.


《법구경》은 말합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이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이 자신을 용서해야

그 용서가 아들에게 흘러갑니다.


《금강경》의 구절을 기억해 보세요.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말은 “과거의 후회에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마음속의 그림자일 뿐,

그림자에 집착하면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후회의 자리에서 연민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질문) “그럼 아들과의 관계는 회복될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자신을 바꾸면,

그 변화는 반드시 아들의 마음에 닿습니다.


지금은 아직 단단한 얼음 같겠지만,

그 얼음 밑으로 따뜻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緣)의 힘입니다.


이제 이렇게 다짐해 보세요.

“나는 아들을 미워한 적이 없다.

다만 어리석었을 뿐이다.

이제 그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매일 조금씩 자비로운 아버지로 다시 태어난다.”


이 다짐이 바로 새로운 인연의 씨앗입니다.

용서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월 속에서 묵묵히 변한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말씀 한 구절을 드립니다.

“罪를 알고 참회하면,

그 죄는 물에 떨어진 잿가루와 같다.”

— 《대반열반경》


당신의 죄책감은 이미 녹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용서하고,

그 용서의 마음으로 아들을 품으세요.

그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참회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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