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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2. "여래는 어디에 머무는가?"

— 본래청정과 여래장

by 이안

1. 도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새벽, 창문을 반쯤 열어두면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든다. 그 속에서 마음 한가운데에 오래 묵혀둔 생각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나는 본래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어릴 적부터 끝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분노와 후회와 열망은 늘 바뀌는데, 그 바뀌는 것들을 바라보는 자리는 이상하게도 늘 고요하다. 능가경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여래는 어디에 머무는가. 부처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좇다 보면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 즉 본래청정의 세계가 열린다.


2. 경전 내용 소개


능가경에서 문수보살은 부처에게 묻는다. “여래는 어떤 곳에 머무르며, 어떻게 그 자리에 드는가.” 부처는 이 질문에 단호하고도 미묘한 방식으로 답한다.


“如來離諸相, 無所住.”

“여래리제상, 무소주.”

“여래는 모든 상을 떠나기에, 머무는 바가 없다.”


여기서 여래는 기적을 일으키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형상과 개념을 떠난 마음의 본성’을 상징한다. 능가경은 여래를 일종의 마음의 깊이로 설명한다. 모든 번뇌가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생멸이 일어나기 이전의 조용한 바탕, 그것이 여래가 머무는 곳이다. 또한 능가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心淨則見佛.”

“심정즉견불.”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 자리에 부처가 드러난다.”


즉 여래는 외부의 세계에 존재하는 완전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 마음이 맑아졌을 때 드러나는 궁극적 본성이다. 마혜수라왕은 이 설명을 듣고, 부처가 말하는 청정이 “감정의 억압”을 의미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는 “청정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는 마음의 뿌리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능가경의 본래청정은 현실을 부정하는 고요가 아니라, 번뇌의 근원을 이해한 후에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맑음이다.


3. 교학적 해석


본래청정은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이며, 특히 여래장 사상과 깊게 연결된다. 여래장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깨달음의 씨앗’이자 ‘마음의 순수한 바탕’을 뜻한다. 유식학에서는 이를 심체청정 또는 무구식의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즉 마음의 표면에서는 수많은 번뇌와 집착이 일어나지만, 마음의 근원층에는 변하지 않는 투명한 바탕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본래청정을 ‘영원한 자아’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능가경은 여래장을 실체적 영혼이나 영원한 자아로 규정하지 않는다. 여래장은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깨달음이 가능한 구조’, 즉 무아 속에서 드러나는 가능성이다.


만약 여래장이 실체라면 무아 사상과 충돌하지만, 능가경은 이 모순을 피해간다. 여래장은 본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번뇌가 걷힐 때 드러나는 ‘가능성’이며 ‘비어 있는 자리’이다. 또한 능가경은 여래를 언어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비판한다.


“若以言說求如來, 是則不得.”

“약이언설구여래, 시즉부득.”

“말로 여래를 찾으려 하면, 곧 얻지 못한다.”


이 말은 여래가 형상으로 붙잡히지 않으며,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래는 경험 이전의 마음의 바탕이며, 분별이나 언어가 만들어낸 개념 이전의 자리이다.


이 점에서 여래장은 금강경의 무주(無住)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머무르지 않기에, 모든 곳에 드러난다. 개념을 붙잡지 않기에, 모든 순간에서 깨어 있다. 유식학적으로 보자면, 여래장은 아뢰야식의 오염된 종자를 정화해 ‘무구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층위다. 능가경은 이 전환이 수행자에게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번뇌의 소멸보다 ‘본성의 드러남’이라는 관점에서 강조한다.


4. 현대적 연결


현대 심리학에서는 ‘본래청정’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쓰지는 않지만, 비슷한 개념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등장한다. 마음의 가장 깊은 층위에는 변하지 않는 평정한 상태가 있으며, 스트레스와 감정은 그 위에 떠오르는 파도라는 관점이 그렇다. 예를 들어, 마음 챙김 기반 인지치료(MBCT)에서는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는 안정된 인식 능력이 고통의 순간에도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여래장의 ‘잠재적 청정성’과 상통한다.


또한 트라우마 치료에서도 비슷한 발상이 있다. 트라우마를 치료한다는 것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아래에 있는 더 큰 자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는 능가경에서 말하는 “번뇌가 사라지면 본성은 스스로 드러난다”는 흐름과 닮았다. 고통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직시할 때 마음은 자연스럽게 맑아지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도 여래장은 현상학의 “지각 이전의 지각”, 즉 세계를 받아들이는 근원적 투명성과 연결된다. 현상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기 전에 이미 세계를 열어놓고 있는 의식의 바탕을 강조한다. 이것은 여래장이 설명하는 마음의 깊은 자리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분별의 소음이 줄어들 때, 마음의 바탕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명상과 현상학적 직관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결국 능가경이 말하는 여래는 이해하거나 정의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장 깊은 마음의 지평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뿐이다. 그리고 그 지평은 감정의 파도에 잠겨 있지만,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다.


5. 실천적 사유와 맺음


오늘 나는 내 마음의 바탕을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따라가느라, 그 아래에서 고요히 빛나는 본래 자리와 눈을 맞추지 못한 것은 아닌가. 여래는 멀리 있지 않다. 여래는 마음의 가장 깊은 지층에서 늘 조용히 흐르고 있으며, 우리가 분별을 내려놓을 때 그 자리는 문득 드러난다.


본래청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지 않되,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더 깊은 흐름을 바라보는 일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물이 더 맑아지듯,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 비로소 그 바닥의 빛이 드러난다.


오늘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라.

그 순간, 여래가 머무는 자리는 이미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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