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민방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S PD에게--
나는(=피터팬 PD) MBC 아카데미 (MBC 문화방송의 자회사로 방송지망생들을 위한 교육기관) 연출반 5기 졸업생이다. 1994년 여름은 기상이변으로, 가장 무덥던 여름이기도 했는데, 방송 프로그램의 연출가가 되겠다는 희망에서, 그해 여름에 작열하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똘똘 뭉친 50여 명의 방송지망생들과 보낸 시간들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하고 설레던 시기이기도 했다.
20년 혹은 30여 년 만에 그중 몇 명을 이곳 제주에서 만났다. 우리들은 어느덧 50대 초반의 장년이 되어 있었지만 30여 년 전의 그날처럼 웃을 수 있었다.
1993년 대학 졸업반이었던 피터팬은, 12월에 대학생활에서의 마지막 강의를 듣고 복도를 걸어가다, 이젠 더 이생 학생이 아니니까, 취업을 해야 한다는 걸 갑자기 깨달았다. 요즘처럼 대학교 1~2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해서 스펙을 쌓아야만 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황당한 얘기겠지만, 나는 학생회 집행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생활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고(한국사회에서 1980년 후반은, 학생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상당히 치열한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취업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졸업을 두 달 여 남기고 복도를 걸어가던 1993년 12월 중순, 졸업반 학생 몇몇이 모여서, 누구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누구는 대졸 초봉이 가장 높은 은행에 또는 통신회사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 나도 이제 두 달 후면, 7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건물을 떠나야 하는구나!, 그럼 나도 직장을 구해야 하는 거잖아!'.
이런 바보 같으니! 그처럼 냉혹한 현실을, 졸업 두 달 전 12월에 마지막 강의를 듣고 깨닫다니!.
대학생활 내내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졸업을 해도 평생 책이나 읽으며 살 거라며, 도서관 열람실과 고대 정대 후문에 있던 백산서당, 녹두 같은 사회과학 전문서적을 파는(당시엔 불량한 사상을 갖고, 북괴와 내통하려는 불순분자들이 읽는 불온서적으로도 불렸다) 책방에 처박혀 지냈기에, 취업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보다 학생운동에 더 헌신적이었던 친구들은,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면서, 또는 시민운동가로 살겠다며, 아예 일찍부터 진로를 정해놓기도 했는데, 나는 사회운동에 대해서 그 정도로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노동현장으로 '투신'하는 선후배를 보면서,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자책도 많이 했고, 가두투쟁의 최선봉에 섰다가 투옥되는 동지들을 보면서, 시위대의 후방에서 도망 다니가 바빴던 필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지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1980년대 후반 ~ 1990년 중반은, 학생운동은 물론, 우리 모두가 진지한 고민과 뜨거운 함성을 뱉어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취업에 대한 고민을 며칠 하던 중, ‘학생회에 계속 남아서 사회운동의 길을 같이 모색하자’는 친한 친구 P(이 친구는 지금 인천에서, 지역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학창 시절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가고 있다)의 제안을 뿌리치고, 피터팬 PD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한 회사에 입사를 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보수도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6개월 정도 회사를 다녔지만, 불편한 마음을 단 하루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일단 일도 재미없었고, 사무 서류를 정리하는 일과 속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퇴사를 고민했던 날이 많아지던 중, ‘문화콘텐츠 제작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 하는 생각을 했고, 1994년 여름 MBC 아카데미 연출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출반에는 50여 명의 동기들이 모여있었는데, 첫날 자기소개를 했던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 들어온 내 또래의 친구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던 J형은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면서, 남미에서 영화학 석사를 받아왔다고 했고, 카리스마가 넘치던 어떤 형은, SK에서 대리까지 했지만, 방송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한 여자 동기는 TV 속 탤런트만큼이나 예뻤는데, 입을 떼자 말이 너무 거칠어서 크게 웃었다. 한 누나는 우리나라 방송에 대한 나름의 연출관을 똑 부러지게 표명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오늘 만났구나!'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으며, ‘방송 연출이라는 푸른 꿈을 꾸는 청년들이, 이토록이나 멋지구나! 이들과 함께 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보람을 느끼며 평생 살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든 첫날이었다.
유난히 뜨겁던 94년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기도 했지만, 방송제작을 배우는 6개월 내내, 푸르고 파랗던 하늘만큼이나 맑은 얼굴을 한 청춘들과 함께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다. 수업이 오후 6시에 끝나면, 비디오테이프에 불법 녹화된 해외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면서 진지한 토론회를 했고, 당시만 해도 상당히 번화가였던 신천의 포장마차에서 밤을 새워가며, 방송 프로그램과 연출의 역할에 관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 해 여름을 보내던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는, 한낮의 열기보다도 뜨겁고, 밤하늘의 별보다도 찬란한 희망이 영글어 갔다.
<1994년의 여름은, 피터팬 PD와 MBC 아카데미 동기들이, 밤하늘의 별보다 더 빛나는 꿈을 키워가던
시간이었다>
행복했던 6개월이 훌쩍 지나가고, 당시엔 IMF 전이라서 방송국 PD를 하려는 연출 지망생 숫자보다, 방송국의 PD 일자리가 더 많았기에, 우리 동기 50여 명 중에, 누구는 지상파 방송국에, 또 누구는 독립 프로덕션에, 다른 누구는 그해 개국했던 케이블 방송국으로 전원 취업을 할 수 있었다.
피터팬은 방송국 PD로서의 자질은 가장 떨어졌지만, 어쩌다 시험 운이 좋아서, MBC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MBC 시사교양국의 다큐멘터리 PD는 할 수 없었는데, 그해 입사원서에 [적록색약]은 TV PD를 지원할 수 없다고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라디오 PD를 지원했다.
준비가 안된 라디오 PD가 덜컥 되고 나자, 피터팬 PD는 입사 후 3여 년간 최악의 시절을 보냈는데, 매일 사고만 치고 PD 선배들에게 대들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평소 존경하던 최상일 선배님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고, 겨우 풋내기 연출가로 입봉 할 수 있었다. 피터팬 PD에게 큰 도움을 주며, 필자가 PD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동료들과 선후배들께 항상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얼마 전 제주에서, 젊은 날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을 30여 년만에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냉혹한지라 지역민방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늘 정의로웠던 동기 S는 회사의 괴롭힘을 견딜 수 없어 세상을 떠난 후배를 위해서 투쟁 중이었고, 또 다른 동기는 가정사의 어려움으로, 지금은 농사를 지으면서 어머니를 돌보며 산다 했다. 제주 MBC에서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던 또 다른 동기는, 이젠 관리자가 되어 사측 대표로 노사협의회에 나가야 한다면서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 제주에서 혼자 사는 피터팬 PD는 더 이상 꿈을 꾸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건강도 여의치 않고, 가정에서도 불화를 겪어, 제주에서 하늘과 바람 그리고 파도의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사는 날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코로나의 위험으로 취업의 길은 점점 더 좁아지고, 한국 사회의 주역이 될 대학생들은, 보다 원대한 꿈을 꾸기보다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펴고 일어나기 위해서, 30여 년 전 신천 포장마차에서 영글어가던 청년들의 푸른 꿈을 다시 꾸고 싶은 밤이다. 나도, 우리 사회의 멋진 젊은이들도.
<우리에게 아직 희망과 꿈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PS. S야! 너에게 솔직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94년 여름, 우리 반에서 제일 예뻤던 학생은 사실 아영이었다. 아영이는 지금은 미국 플로리다 대학에서 영어학과 교수를 하고 있단다. 하지만 당시에 아영이는 이미 석재가 찜했고, 나는 그저 봐라 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ㅠㅠ
하지만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시절에 진정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건, 우리들의 푸른 꿈과,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 그리고 우리들의 푸른 시간이었던 거 같다.
지역민방에서도 네가 늘 변치 않는 꿈을 꾸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