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가을 속에서, 설악산의 [용아장성]에 오르다!
1998년 가을에 2박 3일 일정으로 용아장성에 올랐었다. 설악산에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험난한 코스인, 용아장성을 위키 백과사전에서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내설악의 중심에 자리한 용아장성은,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들이 연이어 성처럼 길게 둘러쳐 있으며, 20여 개의 크고 작은 암봉들이 용의 송곳니처럼 솟아 있다. 용아장성은 운해가 암봉들을 휘감을 때면,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듯 신비롭고 경이로운 비경을 보여주며, 가을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면 용아장성은 더욱 비경을 보여준다. “
용아장성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감히 혼자서는 엄두 낼 일은 아니었고, 당시 MBC 라디오에서 산을 가장 잘 탔는, 최상일 PD 내외분을 따라 간 산행이었다. 사람들은 ‘공룡이 이빨을 드러낸 듯’, ‘신선이 내려오는 듯’ 이란 절묘한 표현으로 용아장성을 말한다지만, 나는(=피터팬 PD) 그때 너무 힘들어서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연병장을 도는 이등병처럼,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그저 선배님 내외분을 놓칠세라 헉헉대며 따라갔을 뿐이었다.
1박은 아마도 수렴동 대피소에서 했던 것 같은데, 이 역시 가을의 절정에 설악산 전체를 여인의 붉은 입술 같은, 혹은 노랑과 초록 그 경계 어디쯤 되는 물감으로 휘감어 놓은 듯한, 단풍나무가 물결치는 어느 계곡 근처에서 잠을 잤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그날의 밤하늘이 너무 맑아서, 청명한 새벽녘인 것만도 같았고, 계곡의 물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는 가운데,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밤의 정취를 더욱 설레게 해 줬다는 기억뿐이다. 선배님 내외분과 인생에 대해서 얘기했던 듯도 하고, 내가 약골인 것처럼 생겼는데도, '제법 잘 따라오더라~'는 말에, 겸연쩍어했던 기억도 가물가물 기억 저편 어딘가에 남아있다.
<가을 단풍의 절정. 출처 : 국립공원 공단 >
‘그런데 피터팬 PD는 왜 휴직을 하고 히말라야에 가겠다는 거예요’ 최상일 선배님의 사모님께서 물어봤을 때도, 우물쭈물하다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회사를 1년 휴직하고, 히말라야로 무작정 떠나겠다고 선배님께 처음 말씀드렸을 때처럼, 최상일 선배님께서는, ‘뭐 젊을 때 그런 경험도 할 수 있는 거지’라는 말씀으로, 나를 거들어주셨던 것 같다.
MBC 라디오 PD로 1994년 겨울에 입사해서, 4년가량 일을 했지만 내 적성과는 잘 맞지 않았는지, 피터팬은 거의 모든 프로그램의 AD로 낙제점이었다. 선배 PD를 잘 도와서 프로그램에 도움을 줘야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매번 선배 PD들에게 대들다가 혼이 나거나, 혼이 나는 것도 지칠 때쯤이면, 아예 입을 다물고 게으름을 부리며 태업을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4여 년을 지내는 동안, MBC 라디오본부의 선배님들과 나의 인사고과를 매기는 부장님들은, 나를 어딘가로 쫓아버리지 않고 어떻게 인내하셨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먼저 회사에 다니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1년 동안 휴직을 하고 히말라야에 가겠다고 했을 때, 당시 피터팬 PD 때문에 속을 끓이던 MBC 라디오본부의 선배님은, 속으로는 기뻐하셨을 듯도 하다. 그래도 평소에 늘 존경해왔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의 최상일 선배님께는 이런저런 속마음 얘기를 털어놓았었고, 선배님은 내가 휴직에 들어가기 한 달 전쯤인 98년 가을에, '같이 설악산 용아장성에 가보자’라고 제안을 하셨다.
힘들던 둘째 날의 산행 중, 공룡능선이 보이는 지점 어디 에선가, ‘피터팬 PD~, 땅만 보지 말고 저기 좀 봐요!’라고, 사모님이 말씀하셨는데,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 파랗던 가을 하늘 아래, 수려한 자태를 드러낸 가을의 설악과 마주한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멎는 줄 알았다. 설악은 울긋불긋 가을 단풍 사이에서, 우뚝 고개를 내민 공룡의 이빨 같은 날카로운 화강암의 직벽들로 가득했고, 하얀 우윳빛 공룡의 이빨들은, 기기묘묘하게 서로의 몸뚱이를 잇대고 엮어, 커다 닿고 긴 성(城)의 물결을 펼쳐놓았다.
‘아! 산을 오르는 기쁨의 절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피터팬 PD가 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린 것은 그날부터였다. 사실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1년간 히말라야에 가려했던 것은 등반이 목적이 아니었다. 히말라야의 어느 깊은 산에 들어가서, 운 좋게 명망 높은 요기(요가 수행자)를 만나게 되면, 평생 동굴 속에 처박혀 여생을 보낼 심산이었다. 스물아홉 살이라는 나이와, 피터팬 PD는 무슨 고약한 악연이라도 있었던 건지, 아니면, 애초에 신이 피터팬에게는 서른 살 이후의 삶은 정해놓지 않았던 건지, 청춘도 짝사랑도 일도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죽고 싶은 나날들만 이어졌으니까.
하지만 최상일 선배님과 함께 떠난 산행에서, 그동안 가슴 깊숙이에 숨어있다가 꿈틀대기 시작한 어떤 걸 느꼈고, 나는 네팔의 히말라야와 세상의 모든 모습을 담고 있는 인도 대륙, 그리고 중국의 고비와 타클라마칸 사막 등을 다니며 더 큰 세상과, 사람들을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운해. 출처 : 국립공원 공단 >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제주라는 외딴 별'은, 맑은 가을 하래 아래서 반짝이고 있다. 선선한 바람과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한라산을 등반하기에도 괜찮은 날씨다. 오늘 일기예보에서는 서울과 수도권도 맑은 가을 날씨 일거라고 하니, 서울의 북녘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객들도 제법 있을 듯하다.
나의 절망적인 스물아홉을, 산이라는 희망으로 이끌었던 최상일 선배님처럼, 오늘도 봄의 절정의 맞고 있는 전국의 산에서는, 누구의 아버지 또는 누구의 선배가, 사랑하는 자식들과 방황하는 후배들을, 무한한 가능성과 꿈에 도전할 용기를 주는, ‘산이라는 세계‘로 이끌고 있을 것이다.
<지리산의 아침. 출처 : 국립공원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