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PD의 선곡, 그리고 고마운
배철수 선배님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내게 가르쳐 준 것-

by 이안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는, 방송국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때만큼, 음악을 많이 듣지는 않는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서울 MBC 라디오의 FM PD로 지낼 때는, 선곡하는 게 하루 일과의 반을 차지했으니, 의무적으로라도 음악을 들어야 했다. 음악을 들어야 월급이 나오던 시절이었다고 할까? 그때는 새로 나온 음반이 너무 많아서, 매일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게, 어떤 때는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피터팬 PD가 사랑하는, 아이유, 레드벨벳, 트와이스, 소녀시대, 블랙핑크 등 감사하고 또 감사한, 걸그룹 동생님들의 앨범은, 늘 설레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모아, 모아서~ 앨범을 기다렸지만^^


제주에 와서 홀아비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예전부터 익숙하게 듣던 노래를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에릭 클립튼의 [Running on faith] 같은 명곡이 담긴, [MTV-UnFlugged] 같은 앨범을 반복해서 듣는다. 가수도 소수에 집중되는데, 예전부터 좋아했고 존경하던, Joni Mitchell(조니 미첼), Janis Ian(제니스 이안), Simon&Garfunkel(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나, 좀 젊은 가수로는 Robbie Williams(로비 윌리암스), Jason Mraz(제이슨 므라즈), Adel(아델) 등으로 한정된다


가요로는 이문세 골든 앨범, 김광석 다시 부르기, 양희은의 [고운 노래 모음 1~3집], 김현철 [1~3집], 이적의 앨범과 이정석의 [사랑하기에], 박미경의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 등의 포크/발라드 명곡만 클릭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익숙한 것에서 친밀한 감정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 거다.


특히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거나, 좋은 글감을 떠올리려 할 때는, 평소 애청하던, 조니 미첼의 71년도 발표 앨범 [Blue]를 듣거나,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17살)이 담긴, 75년 봄에 발표한 앨범 [Between the lines]를 반복해서 듣는다.


‘I learned the truth at seventeen’(나는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아버렸어)로 시작하는 ‘Seventeen’은, 1975년 젊은 시절의 [제니스 이안]이 기타를 치면서 라이브 무대에서 부르는 걸 유튜브를 통해 봤는데, ‘고등학교 시절의 자전적인 노래’라면서, 쓸쓸하고도 담담하게 부르는 모습이 멋있었다. 17살에 사랑의 진실을 알아버린 소녀의 쓸쓸한 자기 고백 같은 이 노래를 듣다 보면, 가을 낙엽처럼 바스러질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금방 황량한 가을의 밑바닥으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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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PD로 25년을 살았지만, 즐겨 듣는 음악은,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으로 한정된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음악에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음악 PD 피터팬도 늙는구나ㅠㅠㅠ>


얼마 전 대학시절 존경하던 선배님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관한 얘기를 나눴었다. 얘기 말미에 ‘저는 데미안을 좋아하던, 15살 즈음에 아직 머물러 있는 어리숙한 철부지 같다’는 말을 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첫사랑이자 짝사랑도 참 늦게 시작했다.


28살의 밤하늘이 아름답던 가을밤에, 천둥 같은 짝사랑이 다가왔고, 나는 나보다 7살이 많은 연상의 선배를 짝사랑했었다. 그녀는 ‘돌싱’에다가 아들까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그녀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결혼 후, 아내에게 고백하기도 했는데, 그 후 아내는 나만 보면,


‘내가 결혼해 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돌싱녀의 손자를 돌보는 할아버지가 됐을 텐데..
안타깝다!! 내가 그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라며, 자기가 피터팬 PD의 인생을 구원해주었다며, 나를 놀리곤 했다.


아무튼 1997년 가을, 순진한 28살 청년의 가슴에, 7살이나 많은 돌싱 선배를 좋아하는 건,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라서, 나는 엄정화의 ‘하늘만 허락한 사랑’을 듣고 또 들으며, 울고 또 울었었다. 그리곤, 이런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테고, 슬픈 가슴을 안고, 평생 회사에서 그녀와 마주쳐야 한다면,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에 히말라야로 훌쩍 떠나버렸다. 히말라야로 갈 때 회사 동료들과 대학 동기들한테는, 거창한 ‘구도의 길을 떠난다’ 말했지만, 사실은 짝사랑의 아픔이 너무 커서였다.


노래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그 노래를 들었던 옛 추억과 사람들을 함께 떠올린다. ‘엄정화’의 노래를 들으면, 28살의 울음 가득한 순진한 청년의 눈망울이 떠오르고, ‘에릭 클랩튼’의 [언플러그드] 앨범을 들으면, ‘94년도에 MBC 라디오 PD로 입사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회사생활을 하던 행복한 청년이 생각난다.


‘조니 미첼’과 ‘재니스 이안’은, MBC FM PD의 내공이 깊어지면서, 좀 더 깊이 있게 음악을 듣던, 중년의 피터팬 PD가 떠오른다. 브런치 작가 필명으로 피터팬 PD로 바꾸기 전에는, ‘이안’이라는 작가 필명을 썼었는데, Janis Ian의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Ian' 이란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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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4살에 ‘Society's Child’라는 노래로 데뷔해서, 천재 가수로 이름을 떨쳤던 재니스 이안이 1975년에 발표한 [At Seventeen]의 앨범 재킷.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빌보드 1위는 물론, 1975년 전체 히트 곡 랭킹에서 19위를 기록했다.>


피터팬 PD의 MBC 선후배와 동료들은, 이미 10대와 20대 초반에 Rock 음악과 헤비메탈의 열렬한 팬으로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나의 경우 록음악의 신세계로 입문시켜 준 분은 다름 아닌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배철수 선배님이시다.


나는 94년 겨울에 MBC에 입사를 했는데, 그해 겨울 전설적인 영국의 락밴드 ‘Black Sabbath’가 내한 공연을 했었다. 철수 선배님은 라디오 PD로 입사한 나와, 내 동기 한 명에게 음악을 듣는 시야를 넓혀주시려고,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그들의 공연을 보여주셨고, 나는 그날 ‘사바스 형님’들의 열정적인 무대에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영미 팝의 록음악 계보를, 고3 수험생 모드로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던 행복한 기억이 있는데, 지금도 다소 센 록음악을 들으면, 20대 중반이 넘어 록음악에 심취하던 내가 생각난다.


그래도 지금은 나이가 들고 나니,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락 넘버들이 편하게 들린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뽕끼’ 넘치는 트로트들이 다시 인기를 끄는데, 미국 본고장에서도 CCR처럼 블루스의 슬픈 뽕끼가 ‘제대로’ 넘치면서도, 경쾌한 리듬의 블루스 록 음악들이 좀 더 많이 발표되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이다. 후배들은 나를, 386 꼰대라도 놀려댈지도 모르지만, 이런 가을날에 CCR의 ‘Long as I can see the light’ 같은 노래를 들으면 그야말로 죽음인데... 후배들이 ‘선배 그건 너무 올드하지~~’라고 웃는다면, Inger Marie가 ‘죽이게’ 재즈버전으로 리메이크 한 곡이라도.


그럼 청취율쯤은 쉽게 수직 상승할 텐데... 그나저나, 내 음악의 영원한 은사님 배철수 선배님은 건강하시려나? 얼마 전 페북에서 뵈니, 다리에 깁스를 하셨던데.. 제주에 내려가더니 추석인데도 안부 전화 한번 안 한다고, 매정한 놈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


‘철수 선배님!

제가 제주에서, 선배님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게 되면,

꼭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배철수의 음악캠프] 굳건히 지켜주세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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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최장수 라디오 DJ 중 한 명인 배철수. 올해로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30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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