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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Feb 26. 2024

여행후회

#Day1. 경북 경주시

학교 운동장을 빼곡히 채운 버스 중, 창문에 '5-6'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는 버스에 올라탄다.

“어디 갔나 했는데, 먼저 타고 있었네!”

나는 자연스럽게 기사님 뒷자리에 미리 앉아 벨트를 메고 있는 정은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장장 다섯 시간 끝에 역사가 살아 숨쉬는 경주에 도착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정은이와 서로 싸 온 도시락을 나누어먹는다.

“나는 밤에 하는 프로그램이 제일 기대 돼. 정은이 너는?”

“나도. 담력훈련 재밌을 것 같아.”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압지로 향했다.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절경이었다. 빛번짐이 심해서 나의 애니콜 폰으로는 도저히 담기지 않는 장관, 눈으로 실컷 담기로 했다.

안압지를 한 바퀴 돌고 교관 선생님들과 함께 담력훈련을 했다. 2인 1조로 순서에 맞게 어둠 속에서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정은이의 팔짱을 꼈고, 함께 낱장의 미션지를 보며 어둠 속으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아 큰 소리가 날 때면 나는 정은이의 손을 꽈악 잡았다. 나의 손을 잡은 정은이의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이 칠흑처럼 덮쳤지만 괜찮았다. 정은이와 맞잡은 손이 있어 무섭지 않았다.


#Day2. 전남 여수시

할머니 환갑 잔치를 맞아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여수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 근처에 온 가족이 넉넉히 쉴 수 있는 근사한 독채 펜션을 예약했다고 한다. 삼촌이 불을 피울 동안, 나는 상추를 씻고 항구에서 사 온 생선의 핏물을 뺀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탕을 할 생각이다. 할머니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요즘 자주 저리다고 하신 종아리도 꼼꼼히 주물러 드린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할머니 어깨에 손을 두르고 부두로 밤 산책을 나간다. 어느덧 할머니가 한 품에 쏙 들어온다. 작아졌어도 온기는 여전한 할머니. 다음 칠순 잔치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제주도에 가고 싶다.


#Day3. 서울특별시

현대유럽철학 강의가 끝나고, 과에서 제일 친한 동기인 재원이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재원이가 햄버거를 먹으며 내 눈치를 힐금힐금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우리 다음달에 한 번 여행 갈래?”

“앗, 나는 여행 별로 안 좋아해서.. 귀찮기도 하고. 그냥 근처에서 술이나 마시자.”

.

.

.

#일주일 전

“인생에서 가장 기억 나는 여행이 있나요? 단 3일,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해 드립니다. 여행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여행에서 돌아오는 순간까지 그 어느 순간도 좋습니다.”

“혹시… 가장 후회하는 여행도 되나요?”

“네? 어… 네.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뭐.. 다 가능합니다.”

승화는 신청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에 빠진다.

'첫 번째, 초등학교 5학년 때 간 수련회. 반에서 따돌림 당하는 정은이의 빈 옆자리에 용감하게 앉지 못한 것. 숲 속에서 담력훈련을 할 때 아무도 정은이를 찾지 않아 밤새 추위에 떨며 오지 않을 친구들을 기다리게 한 것.

두 번째, 할머니 환갑 여행에서 숙소에 틀어박혀 닌텐도 스위치만 한 것. 그게 할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 줄 알았더라면.

그리고 세 번째, 가장 친한 친구였던 재원이와 여행을 간 것. 그 때 여행을 가자는 재원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네가 그렇게 낯선 타지에서도 길을 잘 찾는다는 것도, 요리를 잘 한다는 것도, 여행 스타일이 잘 맞는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그럼 내가 그렇게 널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을 거고, 오늘밤 이렇게 울면서 헤어지자고 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일주일 뒤, 승화는 신청서에 작성한 계획대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되돌리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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