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야 Feb 26. 2024

소우주

# 1엔드

한국 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일곱 살은 일명 혼돈(chaos)의 시기를 겪는다. 한국 연나이로 열일곱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시계의 초침은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평균 수명이 늘어 120살까지 살 수 있다는데 고작 열일곱 살 생활기록부에 진로희망을 적어야 한다고 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도 일단 좋은 대학을 가려면 3년 동안 일관되면서 발전되는 진로희망이 필요하다고 한다.


# 2엔드

열일곱 살 A는 교실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적었다. 늘 학교에는 책가방 대신 헐렁한 크로스백을 메고 왔으며, 슬리퍼를 신고 등교하다가 학생부장 교사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가끔 어쩌다 수업에 들어와도 맨 뒷자리에서 인형 쿠션을 베고 수업 시작 10분만에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간혹 수업 시간에 A가 깨어있으면 짝꿍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신기해했고, 곁눈질을 해보면 노트에 깃털이나 사람의 눈 따위를 그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 3엔드

A는 멸치처럼 마른 몸을 갖고 있다. 키는 멀대 같지만 손목은 또래 아이들보다 가냘프고, 실수로 툭 치면 픽 쓰러질 것만 같은 여린 체구를 지녔다. 그 와중에도 학교에서 교과서를 배분할 일이 있거나 선생님이 교무실에 화분을 옮겨달라는 심부름을 시키면 누구보다 먼저 손을 번쩍 들고 앞에 나가서 그 무거운 짐들을 번쩍번쩍 잘도 옮겼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너는 젓가락 같은 팔로 어떻게 그리 무거운 것을 잘 드냐”라고 물었고 A는 그저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 4엔드

A는 4년이 지나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국내는 물론 외신 유명 일간지에도 A의 사진과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런데 국내 언론사는 외신과 달리 A의 속눈썹에 집중했다. A는 차양처럼 드리워지는 긴 속눈썹을 가졌다. 국내 언론사들은 그녀가 짧은 머리에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A의 예전 SNS 행적을 뒤지며 A의 인간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A가 여초 커뮤니티에서 주로 사용하는 밈을 몇 년 전 SNS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극적인 가십과 추측 기사가 일파만파 퍼졌다.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A는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으로 응수했다. 해당 기자회견을 본 네티즌들은 “원래 운동하는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착한 줄 알았더니만…” 등의 조롱과 비난을 일삼았다.




# 1엔드

하지만 열일곱 살 A는 진로희망 칸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확고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성이나 김연아처럼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선수가 되는 게 A의 오래된 꿈이었다.


# 2엔드

A는 교실 의자에 앉아있을 시간이 부족했다. A는 당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훈련에 매진하여 낮에 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집중력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A는 70m 앞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을 수 있는 명궁이기 때문이다.


#3엔드

멸치 같이 마른 몸도 A가 운동을 하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슬림하게 균형 잡힌 신체는 활을 쏘는데 유리했다.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단련된 다부진 팔로 매일 일천 발의 활을 쏘는 훈련을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훈련복이 비와 눈으로 축축하게 젖어도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활의 평균 무게는 2kg이며, 활을 쏠 때는 활 무게의 10배에 달하는 힘이 필요하다.


#4엔드

터무니없는 논란으로 며칠 사이에 온갖 인신공격을 받았지만 A는 초연했다. 세상에는 아무 이유없이 남을 까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타인의 인간성에 잣대를 들이밀고, 당신 마음에 들면 착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고 판단해버린다는 걸  알았으니까. A는 초등학생 때부터 체육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학급 친구들과 다른 일과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A가 교실을 비운 사이에 생겨나는 유쾌하지 못한 소문들도 많았다. A는 그 근거 없는 공격에 대응할 시간에 활 하나라도 더 쏘는 게 중요했다. A는 자신이 집중해야 할 것과 무시해도 될 일을 잘 구분할 줄 알았다.




#슛오프

A는 올림픽 최초 3관왕의 역사를 쓴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이다.

안산 선수는 우리가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들의 의미와 연관성을 완벽하게 깨부수었다.

의자에 오래 앉아있지 않는다고 집중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멸치 같이 마른 몸이라고 운동을 못하는 건 아니다.

물리학에 등장하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 따른 우주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사회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갇혀 생각할 필요도, 그렇게 살 이유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행복을 없애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