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대로 살았다면 겪지 않았을 인생의 큰 굴곡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30살의 나는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평생 겪지 않았을 일들을 많이 겪었다.
십여 년이 훨씬 지난 요즘은 어린 학생들도 스마트폰 어플을 통해서 손쉽게 항공은 물론이고 다양한 티켓팅과 예약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부분 여행사를 통해서 모든 것을 예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나는 조금이라도 돈을 절약해보고자 '호주에서 홀로서기'라는 책을 보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셀프로 진행하였다.
공항에 도착해서 수화물을 부치기 위해 기내용과 커다한 이민용 캐리어의 무게를 재니 중량이 너무 초과하여
초과금액을 줄이고자 같이 온 엄마와 통로 근처에 서서 커다란 캐리어를 열고 막무가내로 소중히 정리해 가며 넣어 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빼냈다. 다시 허겁지겁 욱여넣어 뒤엉켜버린 짐처럼 나의 호주행은 처음부터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게 겁 많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의 홀로서기는 시작되었다.
여전히 철부지인 딸을 먼 해외에 홀로 보내는 엄마는 홀가분하다는 듯
"잘 가. 국외 통신비는 비싸니 연락은 자주 못한다."라며 쿨한 듯 인사하셨지만 서운한 내 표정을 읽으시고는 이내 눈물이 맺히셨다.
엄마의 그런 슬픈 눈을 보자 나도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고 엄마도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쏟으셨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공항 입구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렇게 울었다.
누가 보면 생이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냐며 의아할지 몰라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지내기는커녕 항상 집 근처 외에는 다녀본 적이 없었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였던 나는 인생의 변곡점 앞에서 탑승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로 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비행기 탑승시간에 맞춰 겨우 눈물은 진정했지만 격하게 울었던 탓에 탑승 후에도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환승지인 일본까지는 짧은 비행시간이라 내려서 잠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환승지에 도착하여 티켓팅을 다시 하려니 (분명히 예약을 해서 내역까지 인쇄해 갔는데)내 좌석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너무 황당하고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어설픈 영어로 호소하는 나에게 일본 승무원이 다른 비행기의 좌석을 구해줘서 한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려 다른 비행기로 환승할 수 있었다.
무사히 호주행 비행기를 탄 후 비행기에서 제공된 간단한 간식과 와인을 먹었는데(원래 술을 거의 못하지만 왠지 책에 나온 사례처럼 기분상 나도 와인을 꼭 시켜서 한잔 먹어보고 싶었다.) 흔들리는 기류로 멀미 증상이 오는 상황에서 몸상태도 좋지 않은데 술까지 먹었더니 심한 구토 증상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어설픈 영어로 승무원에게 약을 받아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는데 컨디션도 너무 안 좋고 시작부터 모든 게 꼬였다는 생각에 눈을 감으니 마치 화물칸에 실린 짐승처럼 강제로 어딘가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호주 입국 후 친구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급하게 셰어하우스를 구하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하우스 집주인이 방마다 너무 많은 입주자를 들인 탓에 정부에서 조사가 나왔고 하루아침에 쫓겨날 상황이 되었다.
(사실 더 큰 사건은 이전 글에 적은 것처럼 호주 입국 후 일주일 만에 핼러윈데이에 모르는 남성들에게 날치기를 당해서 모든 귀중품들을 뺏긴 것이 제일 충격적인 일이지만...)
기존에 살던 셰어하우스는 남녀가 다른 방을 쓰지만 공동거실이라 나름 불편하면서도 또래들과 함께 홈파티를 하는 등의 재미도 있었다.
급하게 새로 구한 여성전용 셰어하우스는 나름 편하고 안전한 느낌은 있었지만 방마다 성향이 다른 셰어메이트들이라 결국 생활패턴의 마찰로 대판 싸우는 일이 발생하였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대형 싸움의 전조를 느낄 때쯤 나는 다른 친구 집의 홈파티에 가있었고 내가 없는 동안 아주 큰 싸움이 벌어져서 주인이 와서 중재를 하기도 하였다.
술이 약한 나는 그다지 술과 함께하는 유흥이나 파티 문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이들이 매주 금요일마다 파티는 물론이고 심하게는 거의 매일 저녁마다 홈파티를 했었고 나도 간간히 참석하여 함께 그들만의 문화를 느끼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20대에는 부모님이 통금시간을 정할 정도로 통제가 심해서 밤새 노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하였고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워 보였다. 그렇지만 막상 나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져서 그런 시간을 보내니 이미 내 습성이 달리 길들여져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한 것보다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새로운 경험들이 재미있고 즐겁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킬링타임 같은 그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정작 영어회화 실력을 쌓기 위해서 온 나에게는 차츰 그런 생활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보다 어린 20대 초중반의 이들이 부모가 보내주신 돈을 흥청망청 쓰는 모습을 보거나 또는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번 돈을 술값 등의 유흥비로 거의 다 소비하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차츰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술자리에서 젊은 친구들의 버릇없고 때론 못된, 그런 행동들을 보면서 나는 술자리를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술자리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인드가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친구들은 그런 파티 자리에서 외국인과도 쉽게 친해지고 자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훨씬 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나날이 영어회화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애초에 아니었다.
게다가 술까지 못 먹으니 억지로 무리에 끼여 먹어봤자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결국 계획보다 훨씬 일찍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결론적으로 그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는 않다.
매우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자란 나에게는 한국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계속 살았다면 전혀 경험하지 못했을 다양하고 독특한 경험들을 그곳에서 많이 하게 되었고 그로써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것들도 달라졌다.
나의 사고방식은 물론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의 마음가짐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 견디기 힘들고 눈물 나게 슬프고 때론 무서웠던 경험들이었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나에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된 경험이었다.
'아... 그래서 다들 견문을 넓히라고 하는구나.'
결코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글로는 알 수 없는 것들.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 같다.
사십 대 중반을 앞두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견문을 넓히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젊음은 꾸준히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