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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그래 Jun 23. 2023

산업 스파이

커피프린(스파이)

사실 다도 동아리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는 차를 가지고 내 미래를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해왔다. 그 언젠가가 언젠가부터였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무의식 속에 박혀있는 이걸 그냥 편하게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동아리 가입에 아주 약간은 다른 목적도 존재했지만, 본질은 차였다. 정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나는 차 동아리에 들어가기 전부터 교내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못하고 있는, 하지만 장차 언젠가는 하게 될 차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차 시장의 유력한 라이벌인 커피산업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산업스파이로 활약해 보기로 했다. 사업의 ‘ㅅ’ 자도 모르는 약 스물세 살의 패기 가득 찬 복학생에게 처음부터 라이벌은 동종업계의 티 브랜드가 아닌 같은 음료 시장에서 상위 포식을 하고 있는 커피였던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그래서 나는 적을 알기 위해 적진으로 과감히 투입했다.


그 스물세 살의 복학생은 당시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날, 마치 대2병 가득한 고독한 싱어송라이터처럼 기타를 메고 교내카페에 들어가 물었다.


“여기 알바 뽑나요?”


교내 카페를 제외하고도 학교 후문에 카페는 꽤 있었지만, 문을 두드린 건 단 한 곳이었다. 주로 학교 후문 카페는 개인 카페였고, 찾아갔던 교내 카페는 국내 1호 토종브랜드이자 당시로서는 1위 프랜차이즈였던 카페였기 때문이다.


당시 매니저였던 대장 누나는 그 당돌함에 당황하며, ‘다음 학기 채용은 여름방학 기간에 페이스북 대나무숲 페이지에 공지 올라갈 거예요.’라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대답을 듣고, 몸만 한 기타를 짊어진 채로 꾸벅 90도 인사를 하고는 곧장 카페를 나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카페 첫 회식 자리에서 카페 대장 누님은 내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이런 애도 있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때 그 모습이 인상 깊어서 면접 볼 때까지도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 두꺼운 낯짝과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P의 성향(MBTI)이 더해져 만들어 낸 시너지였다.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부정적으로 작용할지 사실 확률은 반반이긴 했을 테지만, 그걸로 인해 얼굴도장은 확실히 찍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바라던 카페 일을 하게 됐다. 산업 스파이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실 교내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에 꽤나 멋져 보인다는 느낌도 한몫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왜 이렇게 미화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친구들은 아마 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아주아주 예전에 방영했던 커피프린스 1호점이라는 드라마의 지분이 컸을 확률이 높다. 그게 기억을 크게 왜곡시켰던 모양이다. 나도 어쩌면 카페에서 일하는 내 모습이 마치 그 드라마 속 카페 주인공들처럼 멋있게 커피를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러나 카페 아르바이트의 환상은 시작과 동시에 와장창 깨졌다. 처음 맡게 된 파트타임 스케줄이 모두 마감 근무로 들어가는 바람에 커피 내리는 일보다는 바닥 청소를 비롯한 화장실 청소의 비중이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사실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일 시작한 지 며칠도 안 돼 산업스파이로의 굉장한 미션이 함께 깨질 뻔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잘한 고비를 매번 넘겨가며 거의 2년간, 그러니까 대학교 학기로 치면 4학기 정도를 교내 카페 아르바이트 지박령으로 자리매김했다. 시작부터 험난했지만 나름 커피 프린(스파이)로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그 4학기 동안 카페 매니저가 두 번이 바뀌었으나 나는 항상 그대로였다. 말 그대로 고인물, 아니 고인 커피였다. 수업이 끝나면 비는 시간 가서 일하러 가는 게 자연스러웠고, 혹은 내 파트타임이 아니더라도 도와주러 가거나 혹은 할 게 없을 때 쉬러 가거나 하는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 되었다.  


그런데 간혹 첩보물 영화를 보다 보면 스파이들이 본분을 잊고, 그 세계 생활에 녹아들어 행복하게 지내다가 본국에서 보낸 새로운 스파이들에 의해 처단당해야 하는 지령까지 받게 되고, 그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에 쫓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곳의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지키려고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그런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어디선가 그런 흐름을 몇 번쯤 본 것 같다.


내가 그 꼴이 될 뻔했다. 대학 생활 나만의 아지트가 생겨버린 탓에 산업 스파이의 본분을 망각했다. 커피 프린,스파이가 아닌 커피 프린스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처럼 누군가 날 해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커피를 지키려 하지도 않았다. 아니, 굳이 지킬 필요를 느끼진 않았다. 애초에 내가 커피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은 커피를 좋아해봤자 애초에 하루에 한 잔밖에 마시질 못했다. 적정량은 한잔, 두 잔부터는 치사량이었다.


마치 주량과도 같은 거였는데, 지금까지의 나의 커피 빅데이터를 살펴보면 저녁 5시 이후로 커피를 마시면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다. 그래서 저녁 시간이 되면 치사량은 두 잔도 아닌 한 잔으로 바뀐다. 낮에 마시더라도 두 잔을 넘으면 그것도 안 된다. 물론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린다거나 카페인에 엄청나게 예민해 심장이 쿵쾅거린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의 패턴을 완전히 바꿔버린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카페에 일할 때도 주로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카페인이 덜한 차 종류나 카페인이 없는 로즈마리같은 허브류의 티백을 마시곤 했다.


커피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냄새였다. 주문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었을 때 혹은 커피를 시키기 위해 카페에 막 들어갔을 때 커피 향은 너무나 좋다. 그러나 하루 종일도 아닌 고작 서너 시간 파트타임을 하며 카페 주방 안에 있다 보면 커피 원두 향이 생각보다 더 진하게 배고, 그보다 계속 해야 하는 우유 스팀 때문인지 우유 비린내가 옷과 살갗에까지 배어든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일이 끝나고 분명 유니폼을 갈아입고 강의실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딱히 반갑지 않은 녹진한 커피 향과 우유 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스스로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 말했던 커피를 사 마실 때와의 향기로운 커피 향과는 괴리감이 굉장히 크다. 많은 것들이 그렇긴 하지만, 커피 역시 돈 주고 사 마실 때가 가장 향기롭고 맛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온갖 차에 둘러싸여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때도 내 몸에서 차향이 났으면 싶다고 생각했던 건 차를 지금까지도 사랑하는 하나의 이유다.

  

그런 이유로 다행히 산업 스파이의 본분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고,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카페를 과감히 떠날 수 있었다. 내가 떠난 자리에 친한 친구를 심어두고 나오는 마지막 미션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며 산업 스파이 활동은 나름 성공적으로 종료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차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음 산업 첩보 활동은 주류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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