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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은희 Sep 01. 2023

산티아고일기(2023/01/14) : 순례 14일차

길 뒤에 두고온 것들(프로미스타to까리온 18.9km)

1. 순례길


오늘은 가볍게 19km. 4시간 반 정도 천천히 걸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은 무겁다. 대기에 찬기운이 가득한데 비는 내리지 않음에 그저 감사할 뿐. 그래도 안개처럼 습기가 잔뜩 부유하고 있어 대비용으로 우비를 갖춰입고 길을 나선다.


19km 까리온까지는 4~5km 마다 마을이 나와 걸어도 마음이 편한데, 이후 다음 마을 깔자딜라까지는 다시 17km를 중간기착지 없이 걸어야한다. 19km와 36km 사이. 날씨도 우울하고 이틀 동안 고생시켜 발등이 찌릿한 지경이라 오늘은 조금만 걷고 편히 쉬기로 한다.


순례길은 189번 지방도를 따라 길게 뻗어있다. 한국의 시골 마을(리 수준)들이 그러하듯, 지방도는 마을을 관통한다. 대중교통은 대체로 오전에 한 두개의 버스노선이 다다. 마을 규모는 크지 않고, 대신 농지는 또다시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있다. 


찻길에 사슴인지 고라니인지가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다는 표지판이 종종 보였는데, 그 정도 대형동물이 낮시간 순례객들 앞에 나타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나마 다종다기한 새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나홀로 순례객에겐 마을의 조형물이나 새라도 그저 반가울 뿐. 날씨가 을씨년스러우니 마을마다 있던 고양이도 잘 안 보여 오늘은 조금 아쉽다. 


마을의 중심은 교회와 교회 앞 공터, 마을의 끝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순례객들에게 친절한 길은 아닌데, 그래도 마을 입구나 끝자락에 순례객들을 위한 작은 공터와 비나 햇볕 피할 그늘막이 자리해있다. 순례객이 뜸한 계절엔 노인들만 남은 낡은 마을들이다. 


오늘의 목적지 까리온은 근방에선 제법 큰 마을. 마트도 세개나 있고, 마을 정돈도 잘 되어있다. 숙소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곳. 빽빽한 2층 침대에서 며칠 보냈더니 이 공간이 꽤나 쾌적하게 느껴진다. 


토요일 저녁미사에도 참석했다. 그리 큰 성당은 아닌데 대단한 제단화가 성당 전면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미사지만 전례의 순서는 여전히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어 한국어 기도문이 불쑥 튀어나온다. 가톨릭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이들도 많지만 하나의 전례에는 반성과 고백과 정화와 축복이 기승전결로 다 담겨있다. 왠지 일주일의 시간이 정리되는 듯 편안해진다.


2. 짐정리, 과거에 두고 온 것들


오늘 아침에 짐을 챙기면서 두 가지를 전 숙소에 두고 왔다. 

스포츠 브래지어 두 개 그리고 와인따개.


순례길 시작하면서 브래지어를 거의 안 하고있다. 혼숙하는 일이 많아 처음엔 신경이 좀 쓰였는데, 안 해 버릇하니 또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영영 안하겠다고는 건 아니지만, 신체돌출은 너보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 편하자고 하는 일. 나부터 이제 신경쓰지 않으리. 이제는 그래도 되는 나이가 되었지싶다. 


와인따개는 사실 지금껏 순례 도중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12월 이후 달고사는 목감기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아 잔기침과 가래를 못 끊어내고 있다는 게 첫번째 이유. 밤마다 약을 먹어야해서 술은 자제 중. 3~4일에 한 번 외식할 때 반주 삼아 와인 한 두잔 먹는 게 다인 참으로 건전한 순례생활을 실천 중이다.


개인의 술역사가 꽤나 길다. 중3 16살 때부터 본격 음주인생을 시작했으니 30년 넘게 술을 상당히 많이 마셨다. 돌이켜보니 그 30년 동안 술 마시고 술 깨는데 보낸 시간이 너무 많다. 집안내력으로 술을 꽤 잘 하는 편인데다가 남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사느라 한국인 평균치를 오버할 때가 많았다. 크고 작은 술 사고도 꽤 일으켰고, 그러면서 후회한 일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술을 그리 잘 하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파리 생활 중에도 종종 혼술을 했는데, 홀로 와인 한 병도, 속도감 있게 먹어치우면, 이제는 무리되는 수준이더라. 과음을 하면 잠의 밀도가 줄고 피로도 그 다음날까지 이어질 때가 많다.


누구처럼 끊을 자신은 없지만, 인생에서 지금껏 마신 술의 양이 이미 상당하니 앞으로는 온전한 정신으로 즐길 수 있는 만큼만 마시도록 해 봐야지 다짐하게 된 날. 와인따개를 내려놓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20대 순례객들은 넘치는 에너지에 뭔가 해내고자하는 희망적인 기운을 얻기 위해 이 길을 걷는 듯 하고, 30대 이상은 과거와 단절하고 싶어 이 길을 걷는 경우가 많아보인다. 어떻게 왔어요? 물으면 직장 그만 두고 왔다는 답이 제법 많다. 나도 큰 틀에서는 그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앞으로 뭘 하고 살 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생각은 아직 본격적으로 하고 있지는 못하다. 내 맘대로 될 일도, 이 길에서 생각한다고 찾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나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의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할 일은 찾아내야 하는 것.   


그래서 미래 계획 보다는 과거에서 놓아버릴 것에 대해 먼저 정리해 볼까한다. 


오늘은 브래지어를 버리고,

와인따개를 과거에 두고 오면서 과음하는 버릇에 이별을 고하려한다

내일부터는 무엇을 끊어낼까? 

기존의 직장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정해진 미래이고. 


그래도 직장이 없어지는/달라지는 거지 공부하는 학인 혹은 연구자 정체성까지 한꺼번에 내다버릴 것은 아니어야지. 직과 업을 구분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놓아버리고 어디부터는 이어 갈 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제부터는 마주하고 생각해 볼 계획.

지방도 옆길을 따라 18.9km
수도원 알베르게 입구. 순례객들은 석양(서쪽)을 향해 걷는다.
코로나 이후 알베르게의 침대매트와 베개가 방염방수 제품으로 바뀌었고, 이렇게 일회용 시트를 준다. 겨울 까미노에서 침낭은 필수품. @ Albergue Espiritu Santo
San Juan church


이깨비 조금씩 비워지는 짐~ 그만큼 채워지는 마음들

  =>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서 돌아가게 될 거 같습니다. 마음 여백 많이 만들어 가서 다시 채울께요~

Sukhyun Park 노브라3년차. ^^ 비워내고 덜어내는 순례길이 너무 좋아보여요. 순례길 이야기 너무 재미나게 읽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비우고 돌아오면 일은 분명 또 차고 넘치게 생길거예요. 홧팅~!

  ==> 원체 가슴이 소박해 안 해도 되는데. 신체 돌출되는 거 그게 뭐라고. 해방감이 있어 좋습니다. ㅋㅋ

김영희 언니가 전례를 음미하는 날이 올 줄은. ^^

  ==> 나 고딩때까지는 성당 학생회 대표. 28년 냉담인데 서너번 미사 참석하니 전례 기억이 거의 다 복구되었음. ㅋ

윤신원 건강한 인생을 위해 중요한 것 같아. 비우고 더는 과정… 돌아오면 너를 필요로 하는 일들은 많을테니, 지금은 순례길에 선 네 자신을 보살피고 아껴줘. 늘 대단한 후배, 엄박사를 응원해~~

  => 선배가 계속 따뜻하게 지켜봐주고 있는 거 아니까 힘이 나네요. 앞으로 더 자주 뵈요~ ㅎ

Sook Kim 따땃합니다. 므흣!! 부러워요.

김현종 ㅋㅋ 호승심과 벌써 헤어지다뇨~~

   => 누구랑 겨루거나 싸워서 이길 마음 평소에도 잘 없어요. 이상한 데 술먹기, 산타기 등등에서만 지금껏 오기 부려봤는데 이제는 안 하려고요. ㅋ

심형석 멋지다

   ==>  위에 술 끊었다는 누구 선배 얘기. ㅋ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 해요~

   ==> 이미 많이 안마시니 즐길수만 있다면 그게 제일이지 뭐.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면서 한걸음씩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멋지고, 나도 이런 담백한 자세를 배우게 되네. 항상 응원 합니다~~♡

김익배 갈수록 글과 사진이 더 세련되는것 같유. 자알보구있슈. 암튼 건강하고 무탈하게 마치시길 기도합니다 

  => 네. 샘도 올 겨울 무탈하게 잘 넘기시길. 사모님 순례 생각있으심 체력관리 잘 하시라고 & 겨울 말고 좋은 계절에!

홍주영 누나랑 술을 안 마셔봤네 ㅋ

   ==> 신영덕, 이전순 샘 한국 복귀하시면 언제 같이 함 봐요. 청주권에서 봐도 좋아~ ^^

Sunhwa Kim    술 버릇을 바꾸겠다는 결심과 실천 만으로도 대단한것을 얻는 여정이네요

  ==> 실천이 중요해. 복귀 후 평냉 오픈런 회동 때 나 잘 감시해줘요~ ㅋ

홍윤경 화이팅

   ===> 언니! 3월 인니 갈 계획 궁리 중~ 보고 싶어요~ 뵈러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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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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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예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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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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