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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oomo Nov 26. 2024

김치냉장고

김장, 다채로운 색깔의 그리움 중 하나

  결혼 10년 차. 남편하고 아이 둘, 우리는 4인 가족이다. 지금  있는 냉장고는 딱 10년째 쓰고 있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고도 너무 멀쩡하고 깨끗해서 신기할 정도이다. 신혼집은 17평 오래된 아파트라 신혼 가구를 들이는데 그리 큰 고민이 없었다. 어차피 넣을 공간이 안되었고, 결혼 전 남편이 막 독립해 가지고 있던 가구며 가전을 그대로 쓰게 된 상황이었다. 덕분에 혼수에 대한 부담은 덜었으나 그래도 신혼의 새댁이라 아쉬움이 조금 남았었다. 특히 냉장고가 그랬다. 다들 양문형 냉장고를 사야 후회가 없다 했지만,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2 도어 중 그나마 큰 것으로 장만했다.


 결혼하고 바로 첫 째를 임신했고, 살림이래 봤자 초보 주부의 그저 그런 수준이라, 해 먹는 것도 거기서 거기였다. 냉장고 크기를 나무랄 것도 없이 넉넉하게 잘 썼다. 오히려 더 큰 냉장고는 필요하지도 않았다며 ‘이 정도 사이즈가 딱이었네’하고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둘째가 생기고 10년 차 주부가 된 지금도 사실 그 생각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음식 재료는 어차피 그때그때 조금씩 사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었고, 그렇게 습관이 들어 있어 괜찮았다. 하지만 가끔 냉동식품, 특히 친정에서 보내주신 생선이나 얼린 사골육수 등의 음식을 넣을 자리가 없을 때 ‘냉동고 하나쯤 갖고 싶다’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평소에는 큰 불만 없이 잘 사용하는 냉장고지만, 일 년에 한 번, 시댁에서 김장하고 난 뒤에는 문제가 생겼다. 새벽부터 열심히 일 하고 받아오는 커다란 김장 김치통 하나를 못 넣는 냉장고라니! 온갖 작은 통들을 꺼내 옮겨 담아야만 테트리스 쌓기를 해서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지친 몸으로 정리까지 마치고 나면 '시댁 김장'이라는 이벤트가 이제 겨우 끝난 것 같아 힘들고 지친 마음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시댁은 김치를 많이 담그는 편이었고 일은 많았지만 우리 집에 가져오는 김치는 한 통이었다. 그나마 가져온 김치도 처음 며칠, 몇 주 정도를 지나고는 언젠가부터 심하게 시어지거나 맛이 변하곤 했다. 분명 처음에는 맛난 김치였는데 하나뿐인 일반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동안에 김치는 제 맛을 잃어갔다. 자기 엄마표 음식을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젓가락질도 어느 순간  뜸해지는 그런 김치 맛이 되곤 했다. 자연스럽게 시댁에서 김치통을 들고 오는 횟수가 줄게 되었고, 김장은 남 좋은 일 시키는 기분으로 다니게 되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일하고 새 김치에 맛있는 수육을 싸 먹는 재미에 김장날이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올해는 김장을 안 한단다. 하면 조금 아쉽고 매우 반가울 그런 정도.


 가끔 육체노동보다 감정노동에 지치기는 했지만 남편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느리의 역할은 시댁의 모든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는 어머님의 눈에 나기 싫은 마음도 한몫했다. 예쁨 받지는 못해도 미움받기는 싫어서 힘든 내색이나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내 기준에는) 짓궂은 시누이의 농담들에 맘 편히 웃지도 못하고 속마음이 상하면서도 혹여나 얼굴색이 변해 기분이 티 날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10년 동안 가족이 되어 당연히 함께인 시간들이 쌓였고, 그럭저럭 받아치는 말들도 늘기는 했다. 일 끝내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남편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 수준에서만 투덜거리는 기술도 연마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도 내 기준이지, 듣는 남편 마음은 아닐지 모르겠다.)


 올해는 시누네 일정에 맞추느라 조금 이른 시기에 김장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 친정에서 과일과 김치를 보내주셔서 냉장고는 이미 포화상태인데, 김장 며칠 전에 일정을 통보받았다. 가져다 먹는 김치가 별로 없어 부르기도 뭣하니 아들 너만 와라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정말 안 가도 되는 건가 순간 고민이 되었지만 또 당연히 가야지 싶기도 했다. 가서 열심히 일하고 와야 내 맘도 편하니 결국 내 선택이었다. 안 가고 내내 마음 불편한 것이 더 싫었고, 오지 말라 하신 것이 진심일까 하는 의구심도 조금은 작용했다. 다만 한 가지, 김장하자는 날이 친정아빠의 생신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친정은 시골이다. 차로 다섯 시간은 꼬박 가야 한다. 대학생때부터 서울생활을 한 내가 수시로 고속버스를 타고 다니던 거리인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된 그런 느낌이었다. 큰 마음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 결혼 전에는 수도권을 거의 벗어난 적 없다는 남편의 장거리 운전이 부담이었고, 차만 타면 아이는 칭얼거리고 멀미를 했다. 나는 명절이 짧으면 내려가기를 포기하고 죄송하다 인사만 전하기도 했다. (이 얘기는 너무 길어서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겠다.) 그러니 친정부모님 생신이라고 일부러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은 괜찮다 하셨고 나는 죄송하지만 고마운 마음이었다. 혹여라도 섭섭해하시면 나는 부담감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아주버님과 아이들 고모부의 생일까지 만나서 밥 먹자던 시댁의 일정들을 감당하기에도 너무 벅찬 나였기에 자연스럽게 친정 일에는 소홀했다. 지금은 내가 원하면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무리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홀로 친정행 기차를 타는 상상은 해본다.


 이런저런 이유로 어차피 그날도 전화로 안부를, 축하인사를 전하게 될 터였지만 마침 시댁 김장을 하러 가는 아침, 차 안에서 나의 상황이 갑자기 서럽게 느껴졌다. 누가 일부러 그리한 것도 아닌데 그런 감정에 휩싸이면 나만 손해라 ‘이 정도의 감정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야지’ 생각하며, 조금 이른 아침이지만 아이들을 재촉해 전화를 드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전화를 받지 않으셨고 아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우린 금세 시댁에 도착했다.


 시댁은 차로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에 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정말 애매한 거리이다. 차 타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멀미 난다는 딸을 다독이며 다니는 길이라 쉽지만은 않은 길인데, 2주에 한 번씩 다니던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다니고 있다. 시부모님은 신혼 때부터 우리가 자주 방문하기를 몹시 바라셨고 이제는 부르지 않아도 가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며 방문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지 않도록 무척 신경을 쓰며 산다. 이제 생각해 보면 사람은 정말이지 길들여지는 존재구나 싶다.


 아침에 부지런히 출발해야 해서 자던 아이들을 깨워 온 터라 잠옷 차림인 아이들을 어머님과 형님이 반기셨다. 나를 보며 오지 말랬더니 왜 왔냐면서도 반가워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김장철만 되면 미리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막상 반기는 두 사람을 보며 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내가 단순한 것인지 긍정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아침을 먹고 아주버님이 오시면 그때 버무리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아주버님은 미혼이시라 혼자 와서 일하고 혼자 먹을 김치를 챙겨가지만 사실 김장 김치의 3분의 1 정도 되는 양은 아주버님 차지다. 나머지는 혼자 계신 어머님과 형님이 나눠 가지시는데 김치냉장고 전용 김치통을 들고 온 만큼 들고 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빈손으로 와서 어머님의 (언젠가 내가 주문해 드렸던) 김치냉장고의 김치통 하나를 받아 간다.


 결혼하고 첫 해에 임신한 몸으로 거들었던 첫 김장 때 배추 200 포기, 점점 줄어서 작년엔 80 포기, 올 해는 60 포기의 배추를 절였다고 한다. 많이 줄었지만 여느 가정집의 김장보다는 많은 양이다. 사실 김장에서 가장 힘든 과정은 '배춧속'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어머님이 거의 하시고 가까운 곳에 사시는 형님이 와서 거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튿날 와서 버무리고 담고 옮기고 치우는 일을 하고 점심으로 수육을 먹는 일정이다. 오지 않아도 된다 하셨지만 기어이 오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미 어머님이 많은 일을 하셔서 지쳐있을 것을 알기에 손을 보태고 마무리는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시댁에 오면 아직 어머님이 음식을 도맡아 하시기 때문에 며느리인 나의 역할은 간을 보는 것과 상을 차리는 것과 식사 후의 설거지 정도이다. 명절 같은 때엔 묵묵히 도를 닦는 심정으로 내 할 일을, 소명을 다하듯  매 끼니의 설거지를 한다. 며느리라서 또 이 집의 막내의 처이기 때문에 결국 진짜 막내가 되는 꼴이라서 더 그런 듯하다. 그러니 김장 중의 잡일은 남편이, 후의 설거지는 내가 도맡게 되었다. 커다란 소쿠리며 김장용 식기들이 넘쳐나 평소보다 더 힘든 설거지이지만, 끝까지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가야지 하는 다짐은 필수가 되었다. 다행히도 순조롭고 나름은 즐겁기도 한 김장을 마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김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불현듯 김치냉장고를 구입할 것이라 선포했다. 남편은 어디다 둘 거냐며 태클을 걸었지만, 구입동의만 하면 자리마련이며 정리는 내가 할터이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결국 머지않아 우리 집에 최신형 스탠드김치냉장고가 생겼다. 본래 김치냉장고자리에 놓여있던 온갖 잡동사니를 치우고 버리고 자리를 다시 잡아주는 수고는 반짝이는 새 가전이 들어오자 바로 잊히었다. 새로 받아온 김치는 곧 새 김치냉장고에 자리 잡았다. 얼마나 맛있게 잘 익을까 기대는 부풀었고 심지어 다음 김장이 벌써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이제는 김장을 더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할 것이다. 모든 피할 수 없는 일들은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행복한 법이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대견하다고 여기며 김치냉장고를 닦았다.


- intermission -


  글을 쓰기 시작하고 이 앞에서 멈추었다가, 3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어머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가 주축이던 시댁 김장도 더 이상은 하지 않게 되었다. 김장의 추억은 그렇게 과거로 남았다. 새로 산 김치냉장고는 한참을 비어 있었고, 이제는 잡곡과 과일들로 채워져 있으며  김치는 늘 조금씩 인터넷으로 주문해 먹는다. 그리고 가끔 친정에서 김치를 받아오기도 하지만 나는 늘 어머님과 함께 담근 김치가 그립고, 김장날의 수육이 생각난다. 김장의 추억은 춥고 손 시리고 고춧가루 범벅의 양말이었다가 결국 따뜻하고 촉촉한 수육의 맛으로 끝나는데, 이제는 채울 수 없는 김치냉장고의 서럽고 쓸쓸한 기분까지 더해지고 말았다. 지나고 보니 (다는 아니어도) 즐거웠던 기억, 행복하고 뿌듯했던 시간,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중 제법 큰 이벤트였던 시댁의 김장을, 이제 그 시간들을 덤덤하게 추억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덧붙여 남편의 최애음식은 김치찌개인데, 물론 어머니의 김치가 아니라 그때의 그 맛은 아니겠지만… 남편을 위해 김치찌개를 끓일 때에도 나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사랑과 존경, 미움과 원망까지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만난다. 그리움은 그렇게 다채로운 색이다. 더 이상 김장을 하지 않는데도 11월 김장철만 되면 뭔가 허전하고 헛헛한 기분이 든다. 바람이 제법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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