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과몰입 상태인 우리
네가 만약 울고 있을 때 너를 위로해 주러 온 사람이 너보다 더 크게 울면 어떨까? 더 크게 무너지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면 어떨 것 같아? 감동적일 것 같아? 그런데 매번 그런다면? 매번 네가 오히려 위로해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맞아. 내가 그런 짓을 나의 작은 신에게 저지르고 있었던 거야. 그 아이가 아무리 무너져도 나는 제대로 중심을 잡고 그저 단단한 나무처럼 기댈 수 있게 해주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심하게 그 아이를 안고 무너져 버렸던 거야.
우리 안에 신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 알고 있니? 어린 신 말고 정말 우리의 근원. 우리의 육체가 사라져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그것. 나는 그 존재를 빛의 신이라고 불러.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평범한 사람도 누구나 신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그 신은 [존재함] 이야. 그저 우리를 바라보는 존재. 네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암울한 생각을 해도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지켜보는 존재.
지금 잠시 폰을 내려놓고 그 신을 만나 봐. 잠시 네가 너의 몸 밖으로 나와 너의 주변을 돌며 바라본다고 생각해 봐. 그냥 지켜보는 거야. 신이기 때문에 몸 밖에 있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어. 너의 생각. 너의 고통. 들숨과 날숨. 나의 신은 지금 내가 여기에 글을 쓰는 것을 지켜보고 계시지. 그러면서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녹차 아이스크림의 느낌도 보고 계셔. 이마에 작은 두통, 카페인으로 인한 두근거림, 키보드 소리까지.
마치 악몽을 꿀 때 그것이 꿈인 것을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실재하는 것인 줄 알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으로 평생을 사는 분들도 많지. 고통을 그저 경험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고통 이 되는 과몰입을 하는 거지. 그러다보면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질러. 그러나 우리는 그저 잠시 이 지구에 체험을 하러 온 거야. 고통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나누고 베푸는 체험. 그러면서 커지는 영혼의 확장. 그게 다야. 신을 자주 느낄수록 과몰입에서 벗어날 수 있어. 신은 늘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있어. 과거도, 미래도 아닌 이 순간에 말이야. 우리는 잠시 체험 학습을 하러 지구에 놀러 온 것뿐이라고 그가 말해주고 있어.
내가 놓친 것은 바로 [깨어있음]이었어. 먹자골목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갔을 때 그 아이와 함께 울고 절망할지언정 관찰자의 입장으로 깨어 있어야 했던 거야. 그래야 아이가 신을 느끼고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나의 든든한 엄마가 되어 줘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깨어있음] 만이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현실에 몰입하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까. 인간은 두려움의 동물인지라 매 순간 깨어있진 못했지만 (그래야 고통을 느끼고 사랑을 배우니까) 그래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순간만큼은 알아차리려고 노력했어.
반려견 보스가 나에게 와서 얼굴을 비빌 때, 창가에 햇살 아래 나른함을 느낄 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남자친구와 보스랑 내가 함께 잔디에서 뛰어 놀을 때 등등 내가 행복한 순간만큼은 몰입하지 않고 알아차리려고 했어. 그렇게 깨어 있는 순간은 마치 시력 0.2인 내가 우주에서 가장 성능 좋은 안경으로 세상을 보듯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어. 햇빛을 받으며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스의 털이 한 가닥 한 가닥 반짝였어. 동시에 나의 따뜻해진 심장이 뛰는 것도 느꼈어. 보스의 새근새근 숨소리, 그리고 그에 박자를 맞추고 싶은 나의 숨소리. 창문 밖의 아이들의 웃음소리.
이렇게 나는 나의 작은 신을 통해 [깨어있음]을 배우도록 인도된 거야. 사실 원래도 알아차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 근데 실천이 잘 안 됐어. 그리고 어느새 잊고 있었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방법을 익히게 된 거야. 아직도 여전히 깨어있는 시간보단 과몰입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그래도 최대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특히 작은 신을 만나야 할 때는 더더욱.
도대체 그럼 어떻게 해야 작은 신을 잘 달래서 빛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