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사건의 지평선'의 대성공, 그리고 나
제일 아끼는 물건을 영어로 소개하라는 과제에 망설임 없이 답했다.
가수 윤하 앨범이라고.
처음으로 윤하를 접했던 건 취향이란 게 뭔지도 모를 시절이었다. 동요에서 이제 막 벗어난 나이였다는 뜻이다. 쥬니어네이버가 그냥 네이버보다 훨씬 익숙했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뮤직박스였다. 그러다 처음으로 이 곡을 좋아해,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곡을 만났다. '텔레파시'였다.
텔레파시의 음악성에 의문을 고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나이였다. 통통 튀는 피아노가 좋았고 맑은 목소리가 좋았고 신나는 드럼이 좋았다.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외웠다. 발음에 맞춰 성실하게 외우고 불렀다.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텔레파시가 수록된 윤하의 2집 앨범이었다. CD 케이스가 부서지고 CD에 흠집이 날 때까지 앨범을 돌려 들었다.
이렇게 자라왔으니, 윤하의 신보를 줄줄 꿰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흔한 노래는 싫다 외치던 중학생 때는 4집의 크림소스 파스타를 들었고, 대학 입시에 미끄러져 땅굴을 팔 때는 5집의 airplane mode를 들었다. 음악의 중요성에 높낮이는 여전히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질 높은 음악과 양산형 음악의 차이는 뭔지 조금씩 깨우쳐갈 때 즈음엔 의문이 들다 못해 속상했다. '왜 윤하 노래 안 듣지?'
윤하가 인기 없는 가수였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또래 친구들은 비밀번호 486과 혜성을 노래방 18번으로 명명하고, 윤하가 피처링한 우산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그런데도 못내 아쉬웠던 것은 윤하에게 그것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하는 밝고 통통 튀는 피아노락으로 디스코그래피를 시작했지만, 장르에 그녀를 가둔 적이 없었다. 어설퍼도 '빗소리'에선 재즈를 감행했고, 5집 앨범 'RescuE'에선 알앤비와 힙합까지 도전했다. 윤하의 음악 스펙트럼은 이렇게나 넓은데도 사람들은 '우산'과 '비밀번호 486'과 '오늘 헤어졌어요'만 알아주었다. 내 노력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렇게 수많은 시도를 했는데도 몰라주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사건의 지평선'이 역주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앨범이 발매되고 얼마 되지 않아 당연히 그 앨범 전곡을 들었다. 팝, 락, 발라드, 알앤비를 넘나들며 종류와 장르를 규정짓지 않고 윤하가 잘하는 음악을 보여주는 앨범이라고 생각했다. 가사 면에서도 과학과 음악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시도를 걸출하게 해냈다는 점에서, 정말 뛰어난 앨범이라고 평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발매 초기 반응은 미미했다. 윤하가 앨범을 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렇게 나도 윤하의 신보를 잊어갈 때 즈음, '사건의 지평선'이 스멀스멀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발매 후 한참이 지난 뒤였다. 빠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선 더 그랬다. 처음엔 뾰루퉁한 마음이 더 컸다. '나왔을 때 들어주지 왜 지금?', '또 사건의 지평선만 알아주겠지.' 내가 앨범 제작자도 아닌데 괜히 서운했다. '사건의 지평선'이 잘 되면 잘 될수록 좋아하던 가수의 성공이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괜히 서운한 마음도 커져갔다.
그러다 윤하의 '킬링보이스' 댓글을 보았다. 윤하의 다른 곡들을 추천해주는 댓글이 수도 없이 보였다. 추천 수는 높이 높이 올라갔다. 엄지 척, 버튼을 누르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들어주겠구나.'
비틀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편이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거니까, 미리 겁 먹고 걱정하고 대비해서 나쁠 건 하나 없다고 내 시각을 옹호해왔다. 아무도 몰라주는 시도들에 대해 그럼 뭐해, 생각하며 지레 포기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윤하가 대단해보였다. 사람들이 잘 몰라주는데도 자꾸 시도를 하고, 음악성을 연마해나가는 게 대단해보였다. 어쩌면 그게 내가 윤하의 성공을 그토록이나 바랐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사람들이 그걸 알아봐주길 바라서.
이 글의 제목은 '나는 계획이 있다'의 한 구절이다.
언젠가, 우리는 원하던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구절이다. 사건의 지평선으로 또다시 인기의 궤도에 오른 윤하의 상황과 딱맞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또 알아줄 때가 온다. 치밀한 계획이나 예견은 아닐지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사실을 믿고 마음에 새기기 때문에. 또 그것이 때로,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경제는 곤두박질 치고 있고, 나는 무소속의 백수가 되었다.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지금 그 무엇보다 무섭고 두렵다. 돌다리도 부서질 때까지 두드려보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좋아하는 게 있다면, 계속 해서 해보려고 한다. 결과가 나오지 않고, 아무도 나를 몰라주어도. 언젠가는 '결국에 만날 것'임을 마음에 새기면서.
플레이리스트에 대해 조금 여담을 적어보자면.
앞쪽에 대거 포진된 '물의 여행', '오르트구름' 등은 엄밀히 말하면 락은 아니다. 특히 오르트구름은 컨트리에 더 가깝다. 나머지도 락보다는 팝으로 분류하는 게 맞을 수 있다. 그래도 플레이리스트의 흐름을 깨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새해의 '희망'을 보인다는 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윤하의 끝없는 도전이 담긴 곡이라는 면에서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보았다.
부디 이 글과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결국에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라면서, 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