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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Nov 22. 2024

불행과의 조우

불행에도 점수가 있을까?

모든 것은 다 이 한 통의 메시지로 시작되었다.


“야, 그래도 그만하면 다행이지. 네가 나보다 덜 힘드니까 힘내. 나도 너처럼 아픈 김에 누워 그냥 몇 달 쉬고 싶다. 나 너무 힘들어.”


아니, 이게 지금 불운한 사고로 수술하고 누워있는 친구에게 할 말인가?

나쁜 기지배!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받은 친구의 무척이나 심심한 위로. 꽤나 가까운 오래된 친구에게서 받은 문자 한 통에 마음이 한껏 상해버렸다.


괘씸한 마음에 휴대폰을 휙 병실 침대 모퉁이에 던지곤 간병을 하던 엄마를 등지고 누워버린다.


30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여자.

독특한 이름과 달리 특별한 인생은 살지 못했다.

현재 불운의 사고로 다리의 여러 부위의 다발 골절로 수술 후 입원 중.

힘들어도 버티며 꾸역꾸역 출근하던 직장마저 사고로 잃기 직전인, 이 세상 가장 불운한 여자!

그게 바로 나다.

지금
나보다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지금 내 불행을 몰라봐주는 친구가 미웠다.

나는 그저 위로가 필요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아주 따뜻하고 필연적인 위로.


이 친구는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기에,

나에게 이런 화나는 위로를 전하는 걸까?


아차!

나 또한 그 친구의 불행의 무게와 내 불행의 크기를 무의식 중에 비교하고 있잖아?




타인의 불행과 나의 불행.

불행에도 무게를 달아 경중을 따질 수 있는 걸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통을 가지고 살고 있다.

나의 불행이 누군가에겐 회사를 그만두고 쉴 수 있는 일상의 도피 같은 짧은 휴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서로 각자의 입장을 지독하게 정성스럽게 알 수 없기에..


나도 그간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친구도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쁘고 벅찼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아픔만 생각하기 벅찼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관계다. 서로에게 자신의 짐을 주지 않고 각자의 아픔만을 살뜰히 살필 수 있는 관계.

맞이한 나의 커다란 불행 앞에서, 내 불행이 크지 않다고 해줘서 고맙다 친구야.


그저 각자의 불행과 시련이 있을 뿐.

오늘도 그저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




불행하다는 감정은 어느 순간 찾아와 순식간에 내 일상을 전복했다.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불행하다는 감정은 헤어 나오기 어려운 지옥 같다. 커다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불행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서 감정을 정리하고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자기감정에 정복당한 사람은 마음속 생채기가 지나치게 크게 느껴져 도무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다잡기 쉽지 않다.


내 불행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나는 타인이 내 불행을 알아주길 바랐다. 내 불행에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길 당연하게 바랬던 것 같다.

사실 내 불행은 나만의 것이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비밀이 될 수도 있다.


왜 나의 불행을 타인이 알아주길 바랐던 걸까?

그리고 친구는 왜 자신의 불행과 비교하며 나의 불행을 부러워했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직 너무나 서투른 인간이라 생긴 해프닝은 아닐까? 나의 입장에서 너의 불행을 이해해 보려는 시행착오 같은.

불현듯 타인의 불행을 나의 입장으로 대입해 이해해 보려는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은 타인, 나는 나

각자의 불행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이 넘어 알게 된 불행을 대하는 법>

- 타인의 불행을 보이는 대로 바라볼 것.

- 타인의 불행의 크기를 판단하지 않을 것.

- 타인의 불행을 ‘나라면 어땠을까?’ 공감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

- 누군가 나에게 불행을 털어놨을 땐 ‘힘들었겠네.’ 혼자 감당해 낸 그 마음만을 알아줄 것.


뜻하지 않는 불행과의 조우로, 친구와 작은 해프닝 속에서 단순하고도 큰 인생의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친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일상 안부를 전하던 친구가

“다리는 좀 어때?”물어왔다.


 “아직 조금 좋지 않아서, 걷지는 못하고 치료를 받고 있어.”라고 나는 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다시 한번

“나도 너처럼 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다시 철부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순간 또 이러네 싶어 서운했던 나는

”아~ 진짜, 너 왜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어!

그게 아픈 친구에게 할 말이야?”라고 반문했다.


평소 싫은 소리 하지 않는 내 말에 친구는 순간 아차 했고, 나는 예전에 말하지 못했던 섭섭한 감정을 쏟아냈다.


“나는 아직 얼마나 걸을지도 몰라. 하루에 10분도 내 집에서 아파 걷지 못해.

앞으로 어떤 후유증이 생길 줄 모르는데, 재활 가면 울면서 걷는 연습을 하는 내 팔자가 넌 좋니? “


친구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아픈 줄 몰랐어, 난 그냥 너 다리 부러져서 집에서 편하게 쉰다고 생각했지 뭐야..ㅠ

정말 정말 미안해! “


나는 이해한다.

친구는 멀리 살아 병문안도 오지 못했기에, 나의 이런 깊은 사정까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정도만 힘들 줄 알았어.

사람은 다 각자 자기의 힘듦이 크니까 이해해! “


정말이었다.

나는 이런 서운한 소리를 늘어놓는 친구가 정말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불행에 대한 소소한 고찰로, 나의 몇 없는 오랜 친구와의 다소 무척 많이 섭섭했던 우정을 지켰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사람은 타인이 겪는 중간 정도의 불행을 좋아하고 행복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정말 불행한 사람은 더 싫어요. 그래서 저는 남이 저를 싫어하지 않도록 큰 구멍을 파서 온갖 쓰레기를 땅에 묻고 모르는 체합니다.  

사노 요코, <친애하는 미스터 최> p.113


어쩌면 나의 불행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욕심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람은 타인의 적당한 불행은 수용할 수 있지만, 어쩌면 타인의 정말 큰 불행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사람들과 잘 부대끼며 살아가려면, 나에게 찾아온 큰 불행은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뜻하지 않던 불행과의 조우로 나는 내 불행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가까운 사이’라는 자격으로 모두 다 이해받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내 불행을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고 알아봐 준다면,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수많은 불행과 시련의 풍파 속에서 작은 틈새로도 쉽게 흩어지는 인연들을 이왕이면 지켜나가고 싶다.

타인에게 더 예쁜 마음, 예쁜 마음!


불행아 이제 그만 물렀거라! 훠이,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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