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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더스 2 나노 양산의 운명

싱글 웨이퍼 공정이 함의하는 것

by 권석준 Seok Joon Kwon

일본 정부가 반도체 제조업 부활을 위해 야심 차게 추진하는 투웨이 전략 중 한 축은 래피더스(Rapidus) 프로젝트다. 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프로젝트 이야기를 여러 미디어에서 한 적이 있는데, 최근 업데이트된 소식은 이 프로젝트의 향방이 거의 결정되었음을 알려준다. 물론 안 좋은 방향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공시된 자료에 따르면, 래피더스는 2023년 9월, 홋카이도 치토세 지역에 첫 번째 팹인 IIM-1 팹 착공을 시작했고, 불과 8개월 만인 2024년 4월, 팹의 골조와 클린룸, 그리고 기본 설비 도입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래피더스는 일본 반도체 업계 최초로,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양산 팹 기준으로 다섯 번째로 ASML의 EUV lithography scanner 장비를 2024년 12월 도입했다(12월 18일 장비 설치식 개최).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은 EUV는커녕 ArFi DUV 리소그래피에 대해서도 거의 운용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장비 도입 4개월도 채 안 된 2024년 4월 1일, Pilot line을 시작했다는 것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들이 2025년 4월 1일 Pilot line 시험생산 개시 후, 다시 3개월 만인 7월 중순에 첫 GAAFET 기반 웨이퍼의 전기적 특성(즉, 소자로서 작동을 한다는 최소한의 proof-of-concept 신호) 측정 성공을 완료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래피더스의 최근 공시 자료로부터 우리는 이들이 완료했다고 주장하는 세 가지 과업의 완수 속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팹의 완공 속도다. 착공부터 준공까지 불과 8개월 밖에 안 걸렸다. 통상 걸리는 2년 내외의 기간에 비하면 3배 이상 가속한 것이다. 두 번째는 EUV 도입 후 공정 안정화까지의 속도다. 도입 후 Pilot line까지 100일 밖에 안 걸렸다. 세 번째는 EUV 시험 가동 후, 첫 번째 시험 웨이퍼 생산까지 다시 100일 밖에 안 걸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것인지 비교해 보기 위해 TSMC나 삼성전자 파운드리 팹과 비교해 보자.


EUV lithography는 일단 장비가 팹에 도착한 후에도 설치와 안정화에만 최소 반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TSMC나 삼성전자가 3 나노 공정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EUV를 도입했을 때에도 최소 30주에서 50주, 심지어는 S사의 경우 1년을 넘기기도 했다. 물론 래피더스처럼 EUV 빔을 뽑아내어 웨이퍼 표면으로 유도하여 반사식 마스크를 통해 패터닝하는 공정 자체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이 팹은 R&D 팹이 아니라 엄연히 '양산'을 목적으로 하는 팹이기 때문에, 초기 수율 안정화에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래피더스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들은 TSMC나 삼성전자가 통상 소요로 했던 기간의 1/3-1/4 이하 수준으로 EUV 리소그래피 공정 안정화를 가속한 셈이다.


물론 이를 모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공시 자료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장면은 이들이 파운드리 공정 방식을 TSMC나 삼성전자 파운드리와는 달리, single-wafer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다른 회사들이 주로 배치(batch) 방식을 채용하는 것과 구분된다. 이를 비유하자면 다른 회사들은 현대나 도요타 같은 자동차 양산 라인을 가지고 있는 회사라면, 래피더스는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같은 슈퍼카를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만드는 공정과 비슷하다. 이러한 비유는 실제로 매우 적절한 비유라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같은 슈퍼카는 일반적인 양산용 차량보다 10배 가까이 비싼 단가를 유지할 수 있어서 그러한 수작업 위주의 공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래피더스 팹이 실제로 람보르기니 급의 슈퍼카를 만들 수 있을지 여부는 전혀 장담할 수 없다.


Single-wafer 방식으로 팹을 진행할 경우, EUV lithography 데이터를 얻는 역시, 배치 방식으로 여러 장의 웨이퍼에서 동시 확보된 일정한 품질 수준이 유지되는 데이터와는 질적으로 다를 가능성이 높다. 즉, 처음 몇 번 노광공정을 거친 웨이퍼 중, 적절한 데이터가 나온 것만 가지고서 공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방식이 부정직하다는 뜻이 아니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식의 전략은 애초에 래피더스가 목표로 한 방식의 '양산'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즉, 래피더스의 공시 자료는 사실상 기술마케팅 차원에서 이루어진 홍보성일 가능성이 높다.


팹의 완공도 놀라운 속도로 이루어졌다는 팩트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착공부터 완공까지 1년이 채 안 걸린 것은 애초에 팹의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월 1만 장 이하급의 팹은 R&D 위주의 라인을 채용한 팹과 규모 면에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팹이 작으면 장비 도입 대수도 작고 설치 시간도 단축된다. 골조 공사와 클린룸 설치가 주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과정이겠으나, 팹의 덩치가 작다면 완공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기술력과는 큰 관련성이 없다. 오히려 팹이 완공된 후, EUV의 설치가 빠르게 이루어진 것을 주목해 볼 만한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이 single-wafer 위주로 갔다면, 팹 내부의 공정 장비 배치는 일반적인 배치 공정 위주의 뺵빽한 배치가 아닌, 오로지 EUV 위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다른 장비들의 최적 배치와 활용성을 고려한 최적화는 뒤로 밀리고, 오로지 첫 번째 노광 공정의 데이터를 빨리 뽑아내기 위한 임시 배치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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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하이테크 개발 성과와 기초과학 연구 성과를 해제하는 글을 씁니다. 과학과 사회, 학문의 생태계 지속 가능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이드잡으로 하이테크 스타트업 컨설팅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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