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게는 제대로 된 숙의와 전략이 필요하다.
어제로서 2025년도 노벨 과학상 수상 시즌이 종료되었다. 아마도 올해 두 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추가로 배출한 일본의 학계를 부러워하면서 또 한국의 과학계를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SNS와 미디어 상에서 당장 오늘 저녁부터 홍수를 이룰 것이므로 글도 별로 잘 못 쓰는 내가 그러한 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왕 올해로써 벌써 27명째 노벨 과학상을 배출한 옆 나라 일본의 사례를 좋은 레퍼런스로 사용하여 이슈를 논해 볼 것 같으면, 성토할 때 하더라도 제대로 조금 더 디테일한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자세와 전략을 갖추려는 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도 이미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지난 10년 간 계속 나왔던 이야기라서 너무나 지겨운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언급한 미디어는 어디에서도 본 적은 없다*. (*물론 어딘가에 이미 나온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시면 감사히 참고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추정하는 일본 노벨 과학상 수상 비결에는 일본이 이른바 과거 경제 버블 시기에 잘 나갔던, 즉, 국가 경제력이 팽창 일로에 있던 시기에 선제 투자한 기초과학의 주요 인프라와 일본 특유의 기초과학 도제식 학맥 관리가 주요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기초과학의 인프라나 학맥 관리는 정량적으로 추산하기가 좀 곤란하므로, 이를 조금 더 직관적으로 들여다보려면 일본이 지난 수십 년 간 투자한 R&D 지출 규모를 살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배출된 노벨 과학상급 연구는 국제 공동연구보다는 대부분 일본 내에서 자생적으로 독특한 장인정신 같은 문화와 고도로 조직된 도제식 학맥, 그리고 국립대 위주로 구성된 집단 과제를 기반 삼아 수행된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를 깊이 살펴보기 위해서는 R&D 투자 금액 자체보다는 국가 GDP 대비 정부의 투자 비중을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특히 노벨 과학상에 해당하는 기초과학 분야는 아무래도 단기적 수익성을 목표로 하는 기업보다는 공공 지출 성격이 더 중요하므로, 정부가 순수하게 투자한 R&D 비중을 보는 것이 제일 적확할 것이다.
현재 일본 정부가 공개한 R&D 투자 데이터는 1988년부터 집계된 데이터 밖에 없다. 그 이전의 데이터는 일본의 주요 미디어에 보도된 기사나 일본에서 출판된 논문의 acknowledgement 등을 통해 일일이 집계하는 수밖에 없다. 일부 데이터는 일본에 있는 동료들에게 받았고 일부 데이터는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아카이브에서 샘플링해서 1960년대 데이터부터 확보를 할 수 있었다. 확보 못한 데이터는 back-casting 한 것이다. 이 작업은 이미 작년부터 내가 따로 해오던 것이다.
내가 주로 들여다본 일본 정부 R&D 투자 데이터는 크게 두 가지 축이었다. 하나는 GBARD/GDP다. 이것은 국가가 매년 배정한 R&D 예산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하나는 GERD/GDP다. 이것은 일본 국내에서 수행된 R&D 중, 정부가 자금 조달을 책임진 몫을 따로 계상한 것이다. 원리상으로는 GBARD와 GERD는 크게 차이 나지는 않고 상관관계가 강하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일본 총무성이 공개한 2023년 회계연도 기준 GERD/GDP는 3.70% 로서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여기에는 민간 R&D도 포함되며, 정부 몫만 따지면 대략 0.65% 정도로 나타난다.
1960년부터 2024년까지의 데이터만 놓고 본다면 일본 정부의 GBARD나 GERD의 GDP 대비 비중은 계속 상승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림 1, 2 참조). 일본 정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R&D 투자에 나섰던 것은 버블 시기였던 1980년대 후반이다. 10년 단위로 끊는다면 1986-1995년으로서, 정확히 버블의 최절정기와 오버랩된다. 아무래도 당시 국가 GDP가 팽창되던 시점이고 일본 기업들의 수익도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니 법인세 등에서 국가 세수도 많이 확보되었을 것이고, 엔화 고조 시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여기저기에 인프라 투자나 해외 자산 확보, 그리고 기초과학 같은 당장 수익에 연연하지 않는 투자 집행에 적극적이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니 기초과학 분야로의 R&D 비중도 높았을 것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놀랍게도 버블이 터지면서 일본 경제가 쪼그라드는 추세는 일본 정부의 GBARD/GDP, GERD/GDP 추세에 정확히 반영된다. (첨부한 그래프 1, 2 참조)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90년대 말, 교수님들은 선진국 일본의 과학계 실력에 대한 경탄, 그리고 다소 쪼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일본의 경제력을 언급하면서도 일본이 예전만 못 하다는 이야기를 조금씩 하던 때였다. 그때 얼핏 나왔던 이야기 중에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일본에는 더 이상 재능 있는 학생들이 대학원에, 특히 박사 과정에 잘 진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러한 정부의 기초과학 R&D 투자 축소가 한몫했을 수도 있다. GBARD/GDP와 GERD/GDP 데이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추세에 피크가 존재했다는 것과 그 피크가 GBARD vs GERD에서 조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특히 GBARD/GDP 데이터는 정부의 예산 편성과 배정 의사결정 시점으로, 그리고 GERD/GDP 데이터는 집행 시점으로 측정되므로 두 데이터의 피크 시점은 조금 차이 나는 것은 어찌 보면 예상된 일이다. 특히 대형 기초과학 프로그램은 예산 규모도 그만큼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획-승인-집행의 주기가 비교적 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점이 나타나는 shift가 더 벌어질 수도 있다.
어쨌든 1960년대부터 2024년까지 긴 호흡에서 보자면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중반까지 국가 GDP가 팽창하거나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상황에서도 정부가 꽤 공들여 0.5-1%대의 R&D 투자를 유지해 왔고, 특히 피크 전후로 볼 수 있는 기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넘게 유지되면서 학맥의 한 사이클이 충분히 이어질 수 있는 시간도 같이 확보될 수 있었다. 특히 여기서 흥미롭게 보아야 하는 것은 일본 노벨 과학상 수상자 대부분이 일본의 국립대 (구 제국대)에 재직하는 교수들이었다는 것인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의 주요 국립대는 일본 문부과학성이 따로 지원하는 연구개발 예산이 있어서 보다 안정적인 연구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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