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증설 동조화와 자전거래의 위험성
[AI에서 관찰되기 시작한 순환형 파이낸스는 버블이나 하이프의 전조인가?]
[Disclaimer: 이 글은 AI 산업의 버블 붕괴를 예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 해석한 신호가 있어 그것을 지적해 주시면 적절히 수정 후 반영하겠습니다.]
최근에 AI 산업에서 관찰되는 흥미로운 시그널들은 이른바 순환형 파이낸스 (circular financing)이다. 닷컴 버블 때 투자 열풍에 동참해 본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2000년 전후 미국에서 인터넷 산업의 폭발적 성장 추세는 닷컴 버블을 만들어냈고, 시장도 팽창하면서 닷컴들에 투자하는 것은 일반 투자자뿐만 아니라, 이른다 IT 인프라 공급사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닷컴 버블 당시 인프라 공급사는 네트워크, 서버, 광소자, 미들웨어 공급사 등인데, 이들은 당시 수요가 폭증하는 인터넷 트래픽에 대응하여 백본 중심의 인프라 공급을 담당했던 회사들이었다. 예를 들어 시스코, 루슨트 테크놀로지, 노텔, 알카텔,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델, IBM, 오라클, MS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고객사는 주로 통신사업자들이었는데 AT&T, 스프린트, AOL, 야후, 월드콤 같은 회사들이 있었다. 고객사들은 팽창하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사업을 빠르게 확장하고 싶었는데, 시장 전망과는 달리 여전히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인구 비중은 당시까지는 많지는 않은 상황이었고, 따라서 그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산업의 규모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니 고객사들은 수익을 확보하는 경로가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재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모자랐다. 그 공백은 일반 투자자들 뿐만 아니라 바로 이 공급사들이 일부 메꿔주었다. 이를 당시에도 벤더 파이낸싱이라고 불렀는데, 예를 들어 루슨트, 노텔, 시스코 등이 통신사, 특히 신생 통신사업자에게 금융을 얹어 장비를 공급하는 방식의 파이낸싱이 주종이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미래의 수요를 앞당겨 현실로 실현하는 셈이어서 공급사에게는 위험 부담도 있었다.
당시 백본 공급사 기저에는 반도체 회사들도 있었다. 통신용 반도체와 DRAM, HDD 같은 메모리반도체 수요도 같이 폭증했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들도 닷컴 하이프 행렬에 동참했으며 일부 회사들은 닷컴 버블 붕괴 과정에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당시 닷컴 버블의 순환 파이낸싱에 참여했던 주요 반도체 회사로는 인텔, AMD, IBM, Sun, HP/Compaq 등이 있었으며, 특히 AMD는 닷컴 버블 붕괴 과정에서 2002년 2분기에만 2억 달러 가까운 순손실을 입었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는 당시 잘 나가던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도 직간접적 피해를 입었다. 엘피다, 도시바 등 DRAM 매출은 닷컴 버블 붕괴 후 2/3토막으로 줄어들었으며, NEC는 2002년 회계연도 손실이 3천억 엔, 도시바는 2.5천억 엔 순손실, 한국의 삼성전자, 하이닉스도 꽤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이닉스는 그 당시가 아마 회사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을 텐데 2001년 1-3분기 동안 무려 28억 달러 넘는 누적 적자를 보였을 정도다. 꼭 닷컴 버블 붕괴 때문만은 아니지만, 서버의 주요 부품이었던 HDD 도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구조조정이 있었고, IBM은 아예 HDD 사업부를 2002년 일본의 히타치에 매각하기도 했다.
물론 닷컴 버블 붕괴는 완전히 인터넷 산업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고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 보면 최소한의 피해로 사업의 하이프와 버블이 정리된 후에 제대로 된 산업으로 성장의 궤도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운도 좀 따랐고, 피해가 더 커지지는 않아서 많은 회사들이 큰 손실 이후에도 몇 년 후 닷 회복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다. 만약 그 당시 닷컴 버블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업체들의 괴멸적 타격을 불러왔다면 IT 산업 자체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 일찍 섰을 것이다.
현재의 AI 산업에서는 25년 전에 보였던 닷컴 산업에서의 순환형 파이낸스가 훨씬 더 큰 규모로 보인다. 특히 닷컴 버블 당시에는 공급사 생태계가 비교적 다양했고 그 이전부터 인터넷 기반 사업성이 확인된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과는 달리, AI 산업에서는 공급사 생태계가 독과점에 가까우며 실산업에서의 수익 창출 파이프라인도 여전히 확산된 상황은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 AI 산업의 순환형 파이낸스가 갖는 의미와 문제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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