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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부탄과 인텔의 운명

그리고 미국의 반도체판 존스법의 가능성

by 권석준 Seok Joon Kwon

인텔, 특히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부(IFS)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번 글을 썼지만, 쓸 때마다 인텔의 사정은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지난 3월 신임 CEO로 취임한 립부탄은 몇 주 전 인텔이 현재 AI 경쟁에서 너무 뒤처진 상황이고,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글로벌 랭킹 10위권 반도체 회사로 보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인텔은 그간 상대적으로 앞서 있다고 자인하던 AMD와의 서버 CPU 경쟁에서도 밀리기 시작하면서 최후의 보루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 AI라는 거대한 파고를 제대로 넘으려 시도해 보기도 전에, 텃밭부터 무너질 위중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미 인텔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수만 명의 엔지니어, 매니저급 직원, 연구원을 해고하고 있고, 지난 7월에는 14A 공정 프로젝트를 취소한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18A 공정의 수율이 10% 라는 충격적 이유 때문에 IFS도 이제는 현재 모습으로는 지속가능하기 어렵다는 뼈아픈 내부 진단이 나오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대통령과 인텔 내부 이사회는 각기 서로 다른 이유로 이 위기의 인텔호의 선장을 맡게 된 신임 CEO 립부탄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표면적인 이유는 립부탄의 경영 철학이 인텔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고, 립부탄이 국가 안보를 위한 첨단 반도체 제조라는 중책을 맡은 기업을 이끌 정도로 신뢰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반도체, 특히 AI 반도체로 진화하는 현재의 첨단 반도체 제조 생태계에서의 전략이 엿보인다. 이 전략이 왜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먼저 약간 다른 이야기부터 해보자.


몇 달 전 패트릭 맥기(Patrick Mcgee, 前 파이낸셜타임스(FT) 애플 담당 기자)가 펴낸 신간 '애플인차이나Apple in China' 는 출간 직후 미국 업계와 정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한국에서도 꼭 심층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한국에 번역은 안 된 것 같은데, 번역 에이전시가 있으면 꼭 번역 부탁드립니다. 번역자가 없으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간 심증만 있다고 추정되던 미국 기업과 중국 정부 사이의 협력 구도에 대한 의심이 사실에 가까웠다는 증거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심은 미국의 주요 테크 업체들이 지난 10-20년 간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자본 투자뿐만 아니라, 아예 중국의 첨단 산업, 특히 반도체와 최근에는 AI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국가 전략적으로 중시하는 산업에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애플의 케이스에 국한되었긴 했지만, 맥기 기자의 책에서 낱낱이 그것이 사실에 가까웠음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맥기 기자가 집요하게 추적한 애플의 사례는 애플의 아이폰, 맥북 등의 제조 협력사인 폭스콘이나 페가트론 같은 대만의 IT 제조 전문사들과의 관계부터 시작한다. 애플과 이들 대만 협력사는 중국 현지에서 BYD, Luxshare 등 중국 본토 EMS 방식으로 에어팟부터 아이폰까지 광범위한 애플 제품을 같이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애플 고유의 생산관리 노하우는 물론, 공정 기술, 품질 관리, 납기체계 관리 등의 노하우가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Luxshare는 Wistron 중국 공장을 인수하여 제2의 폭스콘으로 성장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애플이 본격적으로 클라우드 사업을 확장하면서 중국 시장에 대한 투자가 같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클라우드 관련 기술도 중국으로 꽤 많이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iCloud 중국 데이터 서버는 2018년 2월 28일부로 GCBD(Guizhou-Cloud Big Data Industrial Development Co., Ltd.)로 넘어갔는데, 문제는 이 GCBD가 중국 정부가 가장 큰 지분을 갖는 사실상 국유 기업이라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 팔리는 애플 제품의 모든 클라우드 백업 정보는 사실상 중국 정부 소유가 된 셈이다. GCBD를 통제할 수 있는 중국 정부는 데이터 보관은 물론, 검열, 접근 통제 체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0여 년 간 애플이 중국에서 일으킨 매출은 실로 막대한 수준에 이르렀다. 2024년 기준으로, 애플이 중국에서 올린 매출은 애플 전체 매출의 약 17%를 차지한다. 특히 아이폰은 20-25%, 앱스토어 매출도 20% 이상으로, 애플에게 있어 중국 시장은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애플은 중국 정부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iCloud 서버 제어 권한을 중국 정부에 넘기는 것은 물론, 애플 제품의 생산 파트너를 대부분 중국 업체들로 바꾸는 것에도 자의 반타의 반 동의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애플의 기술뿐만 아니라, 애플이 그간 협력하던 다른 회사, 특히 심지어 다른 나라의 반도체 및 IT 제조사들의 기술도 같이 알게 모르게 넘어갔을 기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폭스콘의 기술이 Luxshare로, 삼성디스플레이나 LGD의 기술이 BOE로 새어 나가는 과정에서 한 때 애플의 파트너였던 두 회사의 OLED 등의 기술이 일부 유출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그러한 가능성의 일부일 뿐이다. 애플은 현지 공정 개선이나 DFx(Design for X) 등의 전략을 중국 내에서 실행하기 위해 중국 엔지니어와 상주형 문제 해결 루프를 구축했으며, 이 과정에서 실제로 공정 관리 노하우(도구 세팅, 라인 튜닝, 수율 관리 등)가 중국 EMS 파트너, 부품 공급사 등에 전수되어 축적되기 시작했다. 사실상 애플이 중국을 훈련시킨 셈이다.



맥기 기자가 책에서 지적하듯, 애플이 중국에 대해 집중 투자한 결과물은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 내에 반도체-IT로 이어지는 생태계 구축에 도움을 주었고, 중국의 정치적 특성상, 중국 정부가 막 융성하던 첨단 산업 생태계 초기부터 통제할 수 있는 기반도 만들어 주었다. 그런 역할을 한 것은 애플뿐만이 아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인공지능, 특히, 딥러닝을 기반으로 한 생태계가 오픈소스로 확장된 것의 가장 큰 혜택을 본 국가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구글이 2015년에 공개한 TensorFLow, 메타의 PyTorch 오픈소스를 이용하여 인공지능 알고리즘 개발 초기, 미국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줄일 수 있었다. 특히 화웨이는 2019년 미국 정부로부터 제재 대상으로 지정되기 전, 이미 메타의 PyTorch Foundation에 프리미어 멤버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화웨이의 초기 AI 전용 NPU인 어센드 설계의 방향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오픈소스로 출발한 인공지능, 특히 딥러닝 커뮤니티의 초반 방향에서 정부가 사실 규제할 수 있는 영역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초기에 생태계 형성 과정에서 방향이 확정되기 전, 중국의 여러 업체들은 빠르게 이 생태계의 주요 멤버로 참여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 과정에서 중국의 주요 IT 업체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아 중국 내 반도체 및 인공지능 생태계를 자급화한다는 명목 하에 합작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다. 예를 들어 2016년에 오픈한 바이두의 PaddlePaddle은 정부-대학-회사가 한 팀을 이루어 PyTorch 같은 오픈소스를 만들려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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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하이테크 개발 성과와 기초과학 연구 성과를 해제하는 글을 씁니다. 과학과 사회, 학문의 생태계 지속 가능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이드잡으로 하이테크 스타트업 컨설팅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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