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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연구를 관조하는 방법

연구에도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by 권석준 Seok Joon Kwon

학교에서 교수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책무는 역시 교육이다. 학부생에 대한 강의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대학원생에 대한 지도이기도 하다. 같이 연구하고 있는 (다른 선배 교수님의) 대학원생 한 명을 틈날 때마다 꾸준히 멘토링해 주고 있는데, 점점 성장하는 것이 보인다. 원래 잠재력이 큰 학생이기도 했다.


박사과정 학생이 학위 마무리할 시점쯤 되면 자신이 했던 일을 갈무리하여 하나의 thesis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보통은 저널에 출판했거나 보낸 원고들을 모아 각 챕터 별로 에디팅하고, 앞에 인트로 부분만 조금 더 추가하는 식으로 thesis를 쓴다. 그런데 사실 thesis를 쓰는 과정은 박사과정생에게 있어 자신이 했던 일을 돌아 보고, 그것의 의미를 재확인하기에 아주 소중하 기회이기도 하다. 단순히 짜깁기로 thesis를 부랴부랴 만들기에는 그 기회와 형식이 좀 아깝다.


thesis를 쓰기 전, 심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학생을 불러 놓고 저녁 내내 어떻게 thesis를 구성하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좋은지를 이야기해 줬다. 상이해 보이는 A, B, C라는 주제가 있을 때, 이 주제들을 어떻게 하면 한 지붕 아래에 있는 것처럼 잘 이야기할 수 있을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이야기 해 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학생: A, B, C 를 엮어서 발표하려고 합니다.

선생: 겉으로 보기에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주제를 어떻게 하면 하나의 스토리로 완성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나요?

학생: 솔직히 제목을 이렇게 정하긴 했는데, 잘 와닿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선생: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학생: 초기에 했던 일, 중기와 말기에 했던 일의 성격이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일의 성격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thesis로 만들어야 하는 motivation이 될 것입니다.

학생: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선생: 애초에 하고 많은 재료 중에 왜 이런 재료를 선택했는지, 이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이런 조립 방법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스스로 의미 부여를 해야겠죠.

학생: 랩에서 많이 쓰던 재료라서..

선생: 그것은 지인들끼리만 이야기하는 것이고, thesis에는 보다 아카데믹한 이야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 재료는 다른 재료에 비해 이런 부분이 특징이 있고 차별점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겠죠.

학생: 그런 내용을 intro에 써야겠네요.

선생: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dimension을 벗어나 다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즉, perspective가 필요한 것이죠. 일반론에서 시작하여 점점 깔대기를 따라가면서 좁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현재 사람들이 어디까지 와 있고, 무엇이 문제이고, 그 중 어떤 부분에서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이 박사주제에서는 이 재료와 이 전략을 가지고 접근해 봤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흐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학생: A주제는 일단 이렇게 써 봤습니다.

선생: 물론 지금의 배치도 나쁘지 않지만, 이 전략이 왜 필요했고 이 재료가 왜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plain 합니다.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이죠. 애초에 제시했던 motivation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성능이 기대했던 것 만큼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discussion이 있어야 합니다.

학생: 그 부분에 대해 이런 plot을 그려 봤습니다.

선생: plot이 있는 것은 좋지만, 박사 후보라면, 이 plot 안에 있는 mechanism에 대한 이론적 고찰도 필요합니다. 이미 알려진 이론을 따라가는 것인지, deviation이 있는지, 있다면 왜 있는지, 혹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죠.

학생: 어떤 모델을 쓰면 좋을까요?

선생: 그 부분도 본인이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합니다. 다만, 이런 equivalent model은 생각해 볼 수 있곘죠. physics가 정립된 모형이니, 당연히 fitting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fitting이 잘 되느냐 보다는, fitting parameter의 물리적 의미가 실험적 변수와 어떻게 매칭이 되는지에 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미 출판된 페이퍼이니 더 손볼 곳이 있어도 반영하기는 어렵곘지만, 그래도 이것은 thesis이니, 그 부분이 보강되면 좋겠네요.

학생: 알겠습니다. 그 다음은 선생님도 잘 아시는 B라는 주제인데요. A라는 주제에서 B라는 주제로 넘어 오는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선생: 그럴 때는 본인이 드라마 작가라고 가정해 봐야 합니다. 드라마는 한 번 방영하고 끝나지 않고 시리즈로 끌고 가잖아요? 그런데 매화는 하나의 완결된 영화처럼 제작되기도 하죠. 그렇지만 매화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죠. 그래야 계속 사람들이 궁금해서 다음 화를 보게 될 테니까요. thesis의 chapter도 마찬가지 입니다. 겉으로는 분절된 것처럼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이음새를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학생: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요?

선생: '접속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두 챕터를 AND로 엮을 것인지, THOUGH로 엮을 것인지, BUT으로 엮을 것인지, IN PARTICULAR 로 엮을 것인지, WHILE로 엮을 것인지 등을 생각해야겠죠. 이 경우는 두 챕터가 재료도 다르고 다루려는 영역도 다르지만, 결국 어떤 기능을 타겟으로 하는 것이 공통점이니, WHILE로 가되, 왜 이렇게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 좋겠죠>

학생: 두번째 챕터는 첫번째 연구와는 다르게, 두 가지 상이한 physics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선생: 좋네요. 그 부분을 반영하면 되겠네요. 첫번째 결과에서는 한 가지 physics에 기반한 현상에 기초하여 어떤 좋은 재료를 만들고 현상을 설명하고, 성능을 강화시켜봤다 라는 식으로 가고, 두번째 챕터에서는, 한 가지 physics로는 모자른 것 같은데, 두 가지 이상의 physics를 고려하여, 시너지 효과와 unknown mechanism를 같이 설명하는 것을 motivation으로 삼았다고 하면 되겠네요.

학생: 첫번째 chapter에서 탐색한 결과, 몇 가지 무기가 더 필요했다 라는 식으로 이어가면 되겠네요.

선생: 그렇죠. 그렇게 이어가면 사람들이 납득을 하고 흐름을 따라갈 수 있지. 그런 장치 없이 갑자기 뜬금없이, 이번엔 이런 재료와 이런 성능을 구현해 봤습니다 라고 하면, 좀 따라가기 어렵죠. thesis도 좀 엉성해지고요.

학생: 알겠습니다. 세번째 챕터는 어떻게 가면 좋을까요? 이번에는 전혀 다른 소자와 재료인데요. 마찬가지 전략을 써야 할까요?

선생: 원칙은 대동소이입니다.여전히 앞의 두 챕터와 연결이 되는 것이 필요하죠. 앞의 두 챕터는 공통적인 성능을 타겟으로 했지만, 이번 챕터는 전혀 다른 성능을 보고자 하니까, 왜 그렇게 타겟을 바꾸게 되었는지를 설득해야곘죠. 앞의 두 챕터의 성능은 일단 예상 가능한 범위의 적용이었죠. 세번째는 이 재료가 이런 성능에서 어느 정도 좋은 차별성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으니, 보다 범용의 관점에서 이 재료와 전략이 계속 통할 수 있는지 연구의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그렇게 새롭게 발굴된 성능을 기초로 공학적 관점에서도 실용적인 소자와 재료를 만들 수 있음을 보였다는 식으로 흐름을 만들면 좋겠죠.

학생: 아.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네요.

선생: 그렇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갖춰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디스커션을 주기적으로 많이 해야 해요. 선생과도 해야 하지만, 학생들끼리도 하셔야 합니다. 일명 떠드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사람에 대해 논하지 말고 일에 대해 논하고, 뒷담화가 아닌 앞담화로 좋은 아이디어를 자주 논하기 바랍니다. 남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규격화'가 되는데, 사실 그 과정은 본인에게도 무척 도움이 됩니다. 자주 떠들고 토론도 하세요.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적어도 연구에 대해서라면 신나게 떠들 수 있는 성격으로, 자신을 일부 개조할 필요도 있어요.

학생: 알겠습니다. 확실히 뭔가 계속 대화를 나누니까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선생: 맞아요. 마지막으로 박사과정의 마무리 과정에서 아까 perspective를 스스로 develop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학생: 네.

선생: 졸업할 때 이에 대한 perspective를 꼭 확보해 두길 바라요. 어차피 박사 때 한 일은 박사학위라는 자격을 얻기 위한 연습문제 정도로 봐야 합니다. 평생 이 연구만 할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 한 우물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흥미로운 주제가 있고 그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언제든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고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자신이 뭘 잘 수 있고 뭘 못 하는지 등에 대해 판단하기 어려워져요.

학생: 그래서 계속 말씀하신 dimension을 벗어나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선생: 맞아요. 자신의 일에 대해 객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관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나는 학교, 좁게는 우리 학과에 있는 대학원생은 넓게 보면 다 내 학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면 대응할 수 있는 상황에서라면 대응하고자 한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대화하고 술 상대가 필요하면 술을 같이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파일럿을 키우기 위해 사관학교부터 얼마나 사회적으로 많은 투자를 하는가? 한 사람의 학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투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대로 프로그램을 소화하여 박사 과정 말년 학생쯤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problem solving skill은 거의 교수에 준하는 수준까지는 왔을 것이다. 학자라는 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스토리가 완성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신과의 interaction, 동료와의 interaction, 어드바이저와의 interaction이 필요하다.


대학원생, 특히 박사과정 학생은 이미 프로그램에 들어 가는 순간부터 나의 동료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같은 호흡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이 자신만의 스토리를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주니어 학자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 주고, 나중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학자로까지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는 것 역시, 학계에 먼저 자리 잡은 선배이자 어드바이저가 할 수 있고 잘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많은 선배 교수님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이 일이 결코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며, 박사 학생들이라고 해도 모두가 천양지차라 맞춤형 상담과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점점 현실적으로 보인다. 어린 아이를 성인으로 키우는 것도 힘들지만, 학생을 학자로 키우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고, 그래서 더더욱 더 신경써야 할 일인 것 같다.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그런 멘토가 되고 싶다. 결국 시간과 노력이 일정량 투입되고 나야 조금씩 그 길이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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