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윤리에 앞서, 학문 커뮤니티의 효율성 저해의 문제가 있다.
많은 학자들은 오늘도 publish or perish라는 굴레에 갇혀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출판하는 것을 자의 반 타의 반 지속하고 있다. 특히 임용, 승진, 정년 심사, 각종 과제에 대한 지원에 있어, 여전히 교수나 연구직에 대한 평가는 논문을 위주로 한 경우가 많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많은 연구자들은 한 편의 논문이라도 하루 빨리라도 출판하기를 원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의문이 생긴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논문 원고를 하나의 저널에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대학 지원할 때 여러 대학에 지원하듯, 여러 저널에 동시에 투고하면 안 될까?"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연구 윤리 위반 사항이다. 연구 윤리 위반 전에, 대부분의 저널은 저자들로 하여금 논문을 투고할 때 그 원고가 다른 저널에 발표되었거나, 심사 중이거나, 제출된 논문 원고가 아니라는 서약을 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어겼을 시, 출판된 사후에라도 논문은 철회될 수도 있다. 그런데, 논문 중복 투고가 윤리적 문제나 저널의 독점적 출판 요구 외에,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혹은 구체적인 피해 메커니즘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많은 학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논문의 중복 투고는 왜 실질적인 맥락에서라도 문제가 되는 것인가?
1. 기본적으로 현재 학계의 논문 출판 시스템은 대부분
[논문 투고 > 에디터 심사 > 동료 학자 심사 > 리뷰 피드백 > 원저자들의 원고 수정 > 에디터 판단 후 필요하면 리뷰어들이 재심사 > 에디터가 출판 여부 판단 후, 확정되면 출판, 아니면 리젝]
의 전형적인 프로세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동료 학자들의 심사 (peer-review)다. 동료 학자들의 심사는 대부분 '무료'로 이루어지는데 (유료인 곳도 간혹 있습니다만, 매우 제한적이다. 무료라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100% 옳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서의 최선의 시스템일 뿐니다.), 그 배경에는 '내가 투고한 논문도 다른 동료들이 심사해 주니, 나 역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다면, 동료들의 논문을 기꺼이 심사하겠다'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즉, 동료 심사는 학문 공동체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문 원고 리뷰에는 시간이 꽤 많이 들어간다. 나 같은 경우 논문 한 편에 하루 이상을 온전히 투자하여 심사한다. 방정식 유도도 다시 해 보고, 필요하면 스스로 문헌 조사도 다시 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리뷰 요청이 들어와도 함부로 수락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시간과 정성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원고에 대해서만 수락을 하는 편이다. 보통 논문 한 편에 리뷰어 2-3명, 많게는 4-5명까지도 심사를 하는데, 이들이 나와 비슷한 기준에 따라 비슷한 빈도로 리뷰를 한다고 가정한다면, 논문 리뷰에 총 일주일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불운하게도 시간은 제한된 자원인데, 만약 어떤 연구자가 본인의 시간만 소중하다고 여러 저널에 중복 투고를 한다면, 리뷰어들의 시간도 그에 비례하여 중복되고 결국 낭비되고 말 것이다. 즉, 동료 평가 시스템의 제한된 자원 낭비가 첫 번째 이유가 된다.
2. 대부분의 저널들이 저자들에게 원고를 중복 투고하지 말라는 서약을 받는 이유는, 그 논문의 originality를 담보로 논문 심사하겠다는 공동체 내부의 불문율이자 다른 저널들과의 오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저널들도 좋은 연구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인데, 논문을 중복 투고하면, 논문의 originality를 독자들에게 저널의 신뢰성을 걸고 약속하는 저널-독자의 신뢰 관계를 깨뜨리게 되는 셈이다. 이런 신뢰 관계 붕괴는 연구 논문의 출판 신뢰도까지 깨뜨리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저널과 독자, 그리고 학문 공동체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3. 중복 투고를 하면 어쨌든 저널 입장에서는 논문 번호를 발급하게 되는데, 이것은 한 저널의 acceptance rate에 거품을 끼게 만든다. 실제로는 10편 투고받으면 2편 출판하는 비율을 가진 저널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만약 이 저널이 중복 투고를 허용하게 되면 20편, 30편, 40편 받아서 2편 출판하는 것으로 통계가 잡혀서, 저널의 acceptance rate이 과도하게 낮아지게 되는 왜곡이 발생한다. 이럴 경우, 저널 간의 학문 생태계에 교란이 생기고, 다른 저자들이 저널을 선택하고 판단하는데 노이즈가 커지는 우를 범한다. 결국 저널과 다른 연구자들의 시간과 판단에 대해 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4. 결국 중복 투고를 하게 되어 실제로 리뷰가 들어가게 되면, 리뷰어 pool은 제한적이므로, 다른 연구자의 논문 리뷰는 그만큼 늦어지게 된다. 중복 투고가 허용될수록, 연구 논문 출판은 그만큼 delay가 길어질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이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 지식의 진보 속도를 늦추는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진척을 방해하는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진척 방해가 그 연구자의 승진이나 테뉴어 심사, 연구비 수주, 제자의 졸업 및 취업, 다른 연구자에 대한 약속, 이직 등의 과정에 피해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연구자가 중복 투고를 하는 것 자체는 학계에 미미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나 하나쯤이야' 하는 현상은 중복 투고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미칠 것임이 뻔하기 때문에, 한 번 허용되기 시작하면, '나라고 손해 볼 필요가...'의 풍조가 금방 만연할 것이고, 결국 학계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정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공개하여 동료들의 반응을 보고 싶다면, pre-print server에 올려 두고 버전을 업데이트하면서 copyright도 미리 확보해 두고, originality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면 된다. 다운로드가 많이 된다면 그만큼 학계에서 관심이 많다는 것이고, 저널에서도 관심을 가질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면 pre-print server에 올려놓은 manuscript을 투고 허용하는 저널에 투고하면 될 일이다.
또한, 어떤 저널이 자신의 논문을 받아 줄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면, 논문을 무작정 투고하기 전에, 사실 그 저널의 scope를 꼼꼼히 살펴보고, 최근에 출판되는 페이퍼들의 성격과 주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pre-inquiry letter를 editor에게 보내는 방법 등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널은 연구자들을 위해 Q&A를 잘 갖춰 놓고 있기 때문에, 그 정보를 충분히 숙독하지 않은 채, 저널의 IF나 명성만 보고 마구잡이로 제대로 저널의 scope도 못 맞춘 자신의 원고를 중복 투고를 하는 것은 연구자의 불성실함을 드러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자신의 시간이 1분 1초 소중하다면 동료들의 시간도 1분 1초 소중한 줄 아는 것은, 연구자이기 이전에 성숙한 인격자라면 당연히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사회생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