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의 차이
The greatest thing about being a scientist is you never have to grow up -Neil deGrasse Tyson-
며칠 전 모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후배와 연이 닿아 통화를 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묻고는, 기억을 되살려, 대화를 나눴다.
나: 여~ A교수, 요즘도 XX simulation 연구 많이 하나?
그: 아유. 형 그게 벌써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세요.
나: 그런가? 그럼 요즘엔 무슨 일 해?
그: 요즘엔 완전 분야를 바꿔서, 자율주행차 센서 네트워크 개발하죠.
나: A교수는 완전 컴퓨터 쟁이인 줄 알았는데, 개발도 해? 꽝손 아니야?
그: (약간 서운한 어조) 형, 나도 원래 실험 좋아하고 개발도 잘해요. 형이 몰라서 그렇지. 벤처도 차릴 거라고요. 알지도 못 하면서. 흥. 술이나 사요.
나: (뭔가 실수했나 싶어서) "미안해.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뭐. 술 살게."
이렇게 멋쩍고 짧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돌이켜 보니 본의 아니게 후배의 실력과 커리어를 좀 비웃은 것 같아서 내심 찔렸다. 생각해 보니, 나도 몇 년 전, 비슷한 일을 당했던 기억이 나서 후배의 기분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B라는 사람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자 모 대학 물리학과 출신으로 한 때 꽤 잘 나갔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냥 그런 커리어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한 5-15년 (특정인 저격 금지를 위한 blurring)쯤 위인 사람이다. 학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좀 주고받다가 내가 요즘 포토닉스와 광학, 플라즈모닉스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좀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나는 그로부터 뭔가 같이 할 만한 주제가 있을까 해서 연구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학회 끝나고 회식 때 거나하게 다들 한 잔씩 걸치고 N차 자리에서의 대화였던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고, 대략 내용만 기억해서 각색함)
B: 근데 요즘 권 박사는 무슨 화공 쟁이가 물리학 연구한다고 설치고 다녀?
나: 연구하는 것이 포토닉스가 되다 보니, 예전에 공부한 것 조금 더 심화시켜서 하고 있어요.
B: 다 이해는 해요? 화공과 출신들이 전자기학이나 제대로 공부하나? 그냥 다 일반물리 정도 배우고 끝나는 거 아니여?
나: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물리학도 좋아하고, 연구할 때 물리학 방법론도 많이 쓰는 편이라 물리학 체계 위에서 연구하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아요.
B: 그래도 정통은 아니니 짝퉁이지 뭐.
나: 뭐 그렇게 보신다면 할 말은 없는데, 유학 가기 전에도 주로 논문 쓰는 분야도 물리화학, 화학물리와 응집물리 쪽이었고, 다녀와서는 전자기학과 광학, 포토닉스 쪽으로 연구해야 하니까, 여전히 물리학 바운더리에 있는 것 같아요.
B: 그럼 왜 박사는 화공과로 갔어? 아예 물리과로 가지 그랬어?
나: 물리학 박사를 하는 것이나 화공과 박사를 하는 것이나, 결국 박사 학위는 독립된 연구자로 연구하기 위한 자격 요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학, 석 전공이 화공이니, 어쨌든 유학 가려면 그쪽으로 쓰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고요.
B: 그러면 화공 쪽에서나 연구하지 뭐하려 이렇게 어려운 학문 공부해요? 포톤이 질량이 없는 것은 알고나 있어요?
나: 술 많이 드신 것 같습니다.
B: 아니 좀 웃겨서 그렇지. 물리학 하고 공학이 같아요? 공학자들은 그냥 열심히 기술 개발이나 하면 되지. 뭐 어려운 거 한다고 난리야.ㅎㅎ
나: 그러신 B박사님은 어려운 물리 공부하셔서 지금은 무슨 연구 하십니까?
B: 반도체 하잖아 반도체. 그것도 제일 어려운 화합물 반도체! 공대 나온 사람들 반도체 한다고 깔짝대는데, 뭐 고체물리학이나 제대로 배우고 그러는지 몰라. 재료 쟁이들은 결정학 좀 안다고 깔짝대고 화공 쟁이들은 공정 좀 안다고 깔짝대고 웃겨.
나: 고체물리학이든 전자공학이든, 반도체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 전공이 필요한 학문인데 너무 좁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네요?
B: 그래 봐야 다 물리학 밑이에요. 솔직히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공정 뭐 이런 거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건가 본데, 그런 거 다 기술자 사 와서 하면 되는 거예요. 삼성이 지금 잘 나가는 것 같지만 처음에는 다 기술 사 와서 그렇게 큰 거예요. 사람들이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고 있어.
나: 그래서 박사님은 고체물리학으로 기똥찬 반도체 연구 성과를 최근에 많이 만드신 거죠?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B: 뭐야? 너도 나 지금 못 나간다고 무시하는 거야? 술맛 떨어지게. 내가 예전 같았으면 너 같은 공돌이들하고는 말도 안 섞어. 에이.
그러고 나서 B는 담배 피우고 온다고 자리에서 사라진 후 술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쫓아나간 사람들이 아마도 택시에 태워서 숙소로 데려다준 것 같았다. 한참 후에, B는 다니던 회사를 몇 년 후 관두고 중소 벤처회사로 옮겼다가 그 회사에서도 몇 년 안 되어 나왔다는 소문만 들었다. 지금은 뭐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학계나 연구계에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학회에서도 못 봤고, 그에 대한 학계 소식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
새삼 B박사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학부, 석사, 그리고 심지어 박사 때 했던 공부나 전공이라는 것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가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머리가 한참 잘 돌아가는 20-30대 시절에 깊게 공부하던 그 내용들, 이론 체계들, 학문의 역사는 무척 중요한 지적 자산이다. 애초에 그런 자산의 바운더리를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면 '전공'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의 학부 전공이 무엇이냐, 박사 주제는 무엇이냐, 포닥 프로젝트는 무엇이냐에 앞서,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주제에 대해 어떤 공부 테크트리를 따라왔느냐가 더 중요하다.
일전에 글을 쓴 적도 있데,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기기에서 얻은 이미지에 대한 수학적 해석, 통계물리적 개념의 추출, 신호의 처리와 클러스터링, 웨이블릿 분해를 통한 영역 분리 등의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학부 때 무슨 전공이었든, 박사 때 무슨 주제로 논문을 썼든, 지금 하려는 연구를 위해 어떤 공부를 더 추가적으로 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교과서를 구해서 독학하거나 온라인 수업을 듣거나, 남들이 공개해 놓은 강의 자료를 구해 실습해가며 그 공부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애초에 차근차근 그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선수 과목을 학부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 왔더라면 훨씬 쉽게 그 개념을 이해하고 연구에 적용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므로, 절대적인 시간의 투입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쨌든 박사 학위는 고스톱 치면서 딴 것은 아니므로, 새로운 것을 익히고 내 것으로 만드는 훈련은 되어 있으니, 훈련받은 대로 논리와 수학이 이끄는 방식을 따라 그것을 맥락에 맞게 잘 적용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믿고 따라가면 된다. 결국 한 목적, 한 문제에 꽂혀서 그것을 뚫어지게 보는 연구자가 그 연구의 중심에 들어가게 되는 법이다. 그 과정에서 학부 때 무슨 공부를 했는지, 박사 때 무슨 주제를 연구했는지, 몇 년 전에 무슨 분야에 어떤 저널에 논문을 썼는지는 참고만 될 뿐이다.
물론 수십 년 간 그 분야에만 몰두해 온 학자들의 내공과 실력은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특히 게 중에는 반드시 구루 (guru)가 있고, 그들로부터 얻는 지혜는 교과서나 구글링으로는 얻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배울 수 있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 둬야 한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그 문제를 꼭 풀고 싶다는 의지와 집중력이라고 생각한다. 필요가 있다면, 수단을 강구하게 되고, 어떤 내용을 몰라서 그 문제를 못 풀고 있고, 그래서 잠이 안 온다면, 잠을 쫓아내면서라도 그 내용을 공부하게 된다. 산에 올라야 한다면 한 달간 준비만 하며 마음을 고쳐 먹는 사람보다, 낡은 운동화라도 조여 매고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 결국 더 빨리 오르게 된다.
오나라의 이름난 장수 여몽은 우리 나이로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되던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크고 작은 공을 세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덕분에 기초적 학식이 부족했던 여몽은 이래저래 관료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는데, 보다 못 한 오나라 군주 손권은 여몽에게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였다. 다만, 손권은 그냥 잔소리를 한 것은 아니고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면 충분히 학문이 성장할 것이라는 권면도 헀는데, 이에 감복한 여몽은 절치부심 학문에 힘써, 본래 강했던 무예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감히 문관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오나라의 재상 노숙이 과거의 여몽만 기억하다가 그렇게 학식이 성장한 여몽을 만나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이에 대해 여몽이 한 말은 아주 유명한 고사성어가 되었다.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마주하여야 합니다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待)"
이로부터 유래된 고사성어가 바로 '괄목상대 (刮目相待)'다. 코에이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11'에서도 오나라 장수 여몽은 괄목상대 이벤트 이전에는 능력치가 [통솔력 81/무력 81/지력 49/정치력 48/매력 82]로 설정된 반면, 괄목상대 이후에는 [통솔력 91/무력 81/지력 89/정치력 78/매력 82]로 무력과 매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급상승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지력은 무려 49에서 89로 40, 정치력은 48에서 78로 무려 30이나 올랐는데, 가끔 내가 오나라로 플레이하면 여몽은 상대 책사들의 책략이 거의 통하지 않는 수준에 이를 정도다. 손권이 만약 여몽을 그저 무력만 좋은 장수로 생각했다면, 그래서 학문을 처음부터 권하지 않았다면, 여몽은 그저 전쟁터의 소모품처럼 쓰이다가 요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괄목상대한 여몽은 후에 손권이 주유, 노숙과 같은 레벨로 인정한 인물이 되었다.
사람의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학자들의 학문은 생각보다 그 유효기간이 짧다. 20-30대 때 공부하던 내용은 훌륭한 지적 자산이 될 뿐, 그것만 붙들고 수십 년 학자의 커리어를 버티기에는 커리어가 너무 위태로워진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방법론을 배워야 하고, 업데이트되는 내용 따라 잡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몇 년 전에 만났던 동료들을 그때의 타임 프레임에 갇혀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과거의 위업만 기억하되 현재에 발전이 없는 사람들과 엮여서 과거를 답습하는 굴레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대화를 하지 않고 계속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은 선배든, 친구든, 후배든, 가급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공부의 머리가 트이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어떤 이는 소년 급제하다시피 이미 영재끼를 보이며 학문을 어렸을 때부터 쌓아 온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이는 평생 법관을 하다가 70세에 물리학의 세계에 들어서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거친 북태평양에서 킹크랩 잡이 원양어선을 20년간 타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대학에 진학하여 10년 만에 MIT 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일찍 고시에 패스한 후 사회적으로 스포일 되어 구속당한 어떤 고위 공직자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부모가 진두지휘하여 손수 빚어준 패스를 따라 전교 1등 프레임에 갇혀 있다가, 특권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을 자신의 메리토크라시인 줄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전문직도 많이 존재하며, 평생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살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아프리카로 떠나 죽을 때까지 봉사하다가 그곳에서 눈을 감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리 긴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은 정해진 궤도가 없고, 학문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것은 이제 조금씩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학문을 사랑하고 정말 재미가 넘쳐서 그 학문에 푹 빠진 사람과는 학문의 성장을 놓고 보면 비교할 수가 없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어떤 전공을 했든, 어떤 학교를 나왔든 안 나왔든, 누구에게 사사를 받았든 말든, 그가 지금 추구하는 목적에 그가 올 곳이 매몰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문제를 정말 풀고 싶은가가 더 중요하다. B박사처럼 학문의 장벽을 치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정저지와가 될 뿐이다.
학문의 성장은 장벽을 낮추고 울타리를 부수고 문을 활짝 열고 마음을 낮출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학문을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학자의 특권은 그가 쌓아 온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배워야 하는 학생으로서 내가 아직도 배울 수 있는 것,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일찍 깨닫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