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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ke Jan 02. 2023

아바타-물의 길은 어쩌면 모비딕에서부터

위대한 작품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흐른다

(<아바타-물의 길>이 개봉한 지 꽤 오래 지난 시점이라 마음 놓고 올리는 글이지만, 혹시라도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강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축약 번역된 버전이 아닌 완역본으로 끝까지 읽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비 딕>을 모르는 사람 역시 드물다. 수많은 고전 소설들이 그렇듯, <모비 딕>은 강렬한 이미지로서 오래도록 전해져 왔다. 그러니 바다의 정경과 고래들의 모습이 영화 러닝타임 대부분의 배경이 되는 <아바타-물의 길>에서 <모비 딕>의 유산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글에서는 <모비 딕>이 <아바타: 물의 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한 번 살펴보려 한다.

고래잡이들, 포경선, 그리고 향유고래

<아바타>에서는 주인공들과 주요한 교감을 나눈 생물이 하늘을 나는 이크란이었다. 그리고 바다로 무대를 옮긴 <아바타-물의 길>에서는 그 생물이 바다를 누비는 툴쿤(Tulkun)이다. 조그마한 일루(Ilu)나 전사들이 타는 추락(Tsurak)이 먼저 등장하지만, 그들과 나비족의 교감은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히 지나가며 초반, 숲에 살던 그들이 바다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듯 잠시 등장할 뿐이다. 


진짜 교감은 제이크의 둘째 아들이자, 앞으로 주인공 급의 역할을 할 듯 보이는 로아크를 툴쿤인 파야칸이 구해준 순간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이 파야칸은 모비딕의 재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익숙한 서사와 모습을 자랑한다.


유사점 1. 툴쿤 사냥과 고래잡이, 암리타와 고래기름/용연향


<아바타-물의 길>에서 암리타 채취 장면.

툴쿤 종족과 그 사체의 뇌에서 얻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양의 암리타는 오래 전 고래잡이들이 향유고래를 잡아 얻던 용연향/고래기름과 무척 닮았다. 거대한 고래를 잡아 봤자 쓰이는 비율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마저도 그렇다.

물론 고래잡이들은 용연향뿐만 아니라 고래기름 역시 노렸기 때문에 <아바타> 속 RDA 포경작업부와는 약간 다르지만, 얻고자 하는 것이 그 고기를 섭취함으로써 모자란 식량을 보충한다거나 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저 욕망일 뿐이라는 것은 일치한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했지만 결국은 그 과거의 포경선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배들이 툴쿤 떼를 뒤쫓는다. 약할 수밖에 없는 고래를 사냥해 그 머리를 열고 암리타만을 꺼낸다. 과거 포경선에서도 향유고래의 머리 혹 속에서 고래기름을 채취했었다.




유사점 2. 파야칸과 모비 딕 


모비 딕의 이미지(좌), 아바타-물의 길 속 로아크와 파야칸의 교감(우)

로아크가 파야칸을 처음 만났을 때, 파야칸은 한쪽 지느러미에 작살이 꽂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쪽 지느러미를 반쯤 잃은 상태다. 툴쿤 사냥에서 동족들을 구하려 배 여러 척을 부수고 인간들을 공격하다 얻은 상흔이다. 그리고 모비 딕 역시 그와 같은 작살에 꽂혀 있다. 작중에서 모비딕은 작살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도 고래잡이 배들을 공격하고 부수며 결코 가만히 당해 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은 향유고래였다(이 모비 딕의 모델이 된 실제 향유고래의 이름은 모카 딕인데, 마침내 인간이 모카 딕을 잡았을 때 고래에게 꽂혀 있었던 작살만 19개였다고 한다). 


또한 후반의 전투 장면에서 파야칸은 직접 그 거대한 몸집으로 배를 타격하여 침몰시키는가 하면 인간들이 그를 잡기 위해 쏜 밧줄을 역으로 이용해 사냥꾼들의 보트를 암초에 처박기도 한다. 모비 딕이 꼭 이런 식으로 포경선들과 싸웠다. <모비 딕> 속에서도 이 싸움의 여파로 수많은 선원들이 죽고, 그들이 타고 있던 포경선 피쿼드 호마저 침몰한다. 더불어 모비 딕 이전에는 그 어떤 고래도 이렇게 포경선에 맞서 싸운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고래잡이가 까다로운 것은 단지 고래들의 체력이며 힘이 좋아 포경선이 고래가 지칠 때까지 버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최초로 적극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며 그 자신과 같은 종족을 지켜냈다는 점에서도 모비 딕과 파야칸은 몹시 닮았다.


그렇다면 툴쿤 사냥이나 파야칸의 특성만이 <모비 딕>과 유사성을 가졌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 중에서도 <모비 딕> 속 인물들을 연상케끔 하는 장치들이 여럿 있었다.



유사점 3. 스파이더/마일스 소코로 --- 퀴퀘그


<모비 딕>의 서술자 이스마엘의 친구, '야만족'(번역본 표기를 일단은 그대로 옮긴다) 출신의 퀴퀘그를 기억하는가? '문명인' 사이에서 그들과 섞여서 배우며 살아가는 '야만인'. 그렇다. 나비족 사이에서 나비족의 생활 양식과 문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인간의 아이, 스파이더의 상황은 퀴퀘그와 상당히 비슷하다. 인간들 사이로 돌아갈 기회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로 나비 족을 택하는 스파이더는, 자유 의지로 부족을 떠나 고래잡이의 사회로 뛰어든 퀴퀘그와 무척 닮아 있다. 그는 정신적으로도 나비족과 더 가까우며 그들의 문화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나비족처럼 옷을 입어도 스파이더의 피부는 파랗지 않고, 산소마스크 없이는 판도라에서 살아갈 수조차 없다. 제이크와 아이들은 스파이더를 온전히 받아들여 가족이자 친구로 여기지만 네이티리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좀처럼 내려놓지 않는다. 퀴퀘그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인종적 특성과 부족 전통 문신들이 있기에, 다른 선원들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차이점을 보인다. 퀴퀘그의 다정한 마음씨를 알아본 서술자 이스마엘과 그의 솜씨를 귀히 여기는 선장 에이허브를 제외하면, 그의 겉모습은 꽤 자주 공포, 혹은 몰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를 무시하고 모욕 주기를 서슴지 않았던 선원을 익사의 위험에서 구해 내고야 마는 존재다. 그 선함은 퀴퀘그의 안에 그저 자연스레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스파이더 역시, 그를 돌봐 주던 제이크 가족으로부터 납치하고 형제와 같은 이들을 위협했던 쿼리치의 익사 위기를 외면하지 못한다. 물론 직전에 쿼리치가 웬일인지 마음이 약해져 스파이더를 인질 삼은 네이티리 앞에서 한 발 물러섰다는 변수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잃고 늘어진 그 거구를 붙잡은 조그마한 스파이더가 물을 헤치며 위로 상승하는 장면은 작은 퀴퀘그가 어리석은 선원을 물 밖으로 건져내던 그 장면과 몹시도 닮아 있다.


유사점 4. 마일스 쿼리치/아바타-에이허브 선장


모비 딕은 그를 뒤쫓던 에이허브의 다리를 앗아 간 장본인이기도 하다. 에이허브 선장은 의족을 달고, 그 복수심을 불태우며 다시 바다로 돌아와 모비딕의 흔적을 뒤쫓는다. <아바타-물의 길>에도 신체를 잃고 복수심을 불태우는 인물이 하나 있지 않던가? 그렇다, 마일스 쿼리치 대령이다. 죽지도 않고 아바타의 몸을 한 채 반 정도(?) 부활한 인물이다. 물론 이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있다. 쿼리치의 복수 상대는 당연히도 파야칸이 아니라 제이크와 네이티리 부부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쿼리치를 거의 죽게 만든 것 역시 파야칸보다는 제이크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쿼리치에게 목이 졸려 질 것만 같던 제이크에게 기회를 준 것은 파야칸이 망가트려 가라앉으며 기울던 배였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쿼리치는 에이허브와 많은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에이허브 선장이 조로아스터교(배화교) 신자들을 배에 태우고 협력한 바 있다는 사실이다. 멜빌은 이를 통해 에이허브가 복수심과 광기, 집착에 눈이 멀어 그들이 진리로 여기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멜빌은 퀴퀘그가 여전히 부족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함으로, 또 긍정적으로 그렸지만 퀴퀘그와 달리 진심으로 믿는 대신 이용하기 위해 '이단'과도 손잡는 에이허브의 행태는 용납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마저도 쿼리치와 상당히 유사하다.

에이허브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기독교 세계의 인구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기독교 세계의 이방인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회색곰들이 미주리 주에 정착하여 살 듯 이 세계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봄과 여름이 지나면 숲속의 그 사나운 로간이 나무구멍 속에 들어가 앞발을 핥으면서 겨울을 나듯, 엄동설한 처럼 춥고 황량한 노년에 육신이라는 나무줄기 속에 갇혀버린 에이허브의 영혼도 동굴 같은 그곳에서 어둠의 음침한 앞발을 핥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비 딕>, 34장 中

나비족의 기준으로 본다면 기독교야말로 이상한 신앙이다. 그들의 신앙은 에이와, 즉 판도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쿼리치의 기준으로 본다면 당연히 에이와에 대한 믿음이 '이단'이다. 하지만 쿼리치는 제이크 설리를 잡겠다는 그 목적 하나만으로 판도라의 이크란을 나비족의 방식 그대로 길들인다. 제이크가 네이티리, 그리고 그녀의 부족과 어우러지기 위해 이크란을 길들이고 나아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토루크를 길들였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다. 쿼리치는 나비족의 아바타를 입은 자신을 여전히 인간으로 정의한다. 그렇기에 부하들에게 우리는 이제부터 나비족처럼 행동하고, 나비 언어를 써야 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유사점 5. 제이크 설리-이스마엘


아바타 시리즈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언제나 제이크 설리였다. 아이들 세대의 비중이 몹시 늘었다고는 하나 이 이야기는 애초에 제이크가 없었다면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제이크는 본래 인간이었으나 판도라와 나비 족을 착취하는 인간의 이면을 목격한 후 그들의 잔혹함에 등을 돌리고 아바타의 몸을 입은 채, 나비 족의 일원으로 평생토록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시간이 꽤 흘러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나비 언어보다는 영어를 더 익숙하게 여기고, 활보다는 총기를 들고 전투에 나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비 족의 일원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크게 달라진 것은 이제 그가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과 더 옳은 일을 위해 그간 배우고 믿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종족의 삶을 택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제이크 설리다. 절망 속에서도 주저앉아 있기를 거부하고 전설 속에서나 길들여졌던 토루크를 끝내 길들여 나비 족을 하나로 규합했던 그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꾸만 위험해지는 상황 속에서 쿼리치를 다시 마주한 제이크는 그와 맞서는 대신 은신처를 찾아 바다로 떠난다. 족장의 자리마저 내려놓은 채, 피난민이 된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에서도 제이크는 아이들에게 자꾸만 주의를 준다. 말썽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로아크가 억울해하더라도 당장 마을에 정착하는 것이, 그렇게 안전해지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렇다, 제이크 설리는 방관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모비 딕>의 서술자이자 관찰자, 그리고 방관자이다. 그는 퀴퀘그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이지만, 수많은 독백과 서술을 거치면서도 쉽사리 무언가의 의미를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광기와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내보이며 주변인, 나아가 독자마저 끌고 가는 에이허브와 달리 이스마엘은 홀로 생각하고 독백하며 때로는 책 밖의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의 생각은 놀랍게도 대부분 옳은 것,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것과 같은 도덕적 논쟁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극도로 조심하면 인생에서 이런 숱한 불운을 면할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퀴케그와 연결된 원숭이 밧줄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지만, 때로는 퀴케그가 밧줄을 홱 잡아당기는 바람에 하마터면 미끄러져 바다에 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이다.-<모비딕> 中


이유, 논리, 심지어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대한 걱정조차 없이 모비딕을 향해 달려들던 에이허브 선장과 대조를 이루는 이스마엘의 이러한 특성은 제이크 설리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초반, 그는 이러한 자문을 수도 없이 거친 끝에 부족을 이탈하여 피난민이 되는 것이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고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어쩌면 섣불렀던 결론에 도달한다. 


폭력에 맞서는 대신 투쟁하기를 멈춘 제이크의 선택은 일견 툴쿤 족들과도 몹시 닮아 있다. 툴쿤 족들은 끔찍한 전쟁을 치르며 동족을 상잔하는 비극을 겪은 끝에 모든 종류의 폭력을 거부하기로 협의했다는 것이 영화 속의 설정이었다. 그 맹약 때문에 스스로와 무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파야칸 역시 폭력을 사용한 것으로 간주하여 배척당했다. 그리고 제이크가 닮은 것은 이 파야칸이 아니라 툴쿤 족의 일반적 의지이다. 아들 로아크가 동생 시리를 위해 싸움에 휘말렸을 때 제이크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들이 싸우게 된 동기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로아크가 얌전히 규칙에 따르고 지내라는 자신의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 그 자체이며 아들의 마음에 대해 신경은 쓰지만 그 걱정을 대놓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스마엘 역시 그러하다. 그들의 배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갈등은 선장 에이허브와 일등 항해사 스타벅 사이의 의견 차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바다에서 가장 위험한 고래를 맹목적으로 뒤쫓는 자의 광기와, 필요한 만큼의 수확은 거두었으니 그만 낸터킷으로 돌아가자는 이성은 거칠게 충돌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딱히 누군가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관찰하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이 작품 내에서 가장 대두되는 갈등 앞에서 결코 스스로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홀로 바다에서 목격하는 온갖 상황에서 수많은 철학적 논제와 인생의 딜레마에 대해 서술하는 일은 마다하지 않는 이스마엘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동료들의 갈등 앞에서는 늘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채 방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바타: 물의 길>에서 제이크의 가장 큰 실수 역시 결정을 미룬 채 도망치기를 택했던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로아크가 강력한 툴쿤인 파야칸과 친구가 되며 많은 일들이 해결되기야 했지만, 본래대로라면 제이크와 네이티리에게 가장 잘 맞았던 전장은 울창한 밀림이었다(물론 감독이 세계관 확장을 원한 이상 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이스마엘과 제이크 설리의 차이점은 결말에서 드러난다. 이스마엘은 친우 퀴퀘그를 잃고, 그가 남긴 유품이나 진배없는 관에 매달려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던 다른 배의 선장에 의해 구조된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에이허브도, 스타벅스도, 그 휘하 다른 선원들도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중요한 순간 파야칸의 도움을 받게 된 제이크 설리와 나비 족들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인질로 잡혔던 아이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제이크의 첫째인 네테이얌이 안타깝게 사망하지만, 그것이 나비 족의 승리를 헛되게 만들지는 않았다. 제이크와 네이티리, 아이들과 스파이더는 아들을 관과 닮은 보트에 실은 채 영혼의 나무로 헤엄친다. 이스마엘이 관을 통해 생을 얻은 것과 같이, 제이크는 아들의 관을 떠나보내며 다시금 일어서 맞서 싸울 결심을, 생에 대한 제대로 된 의지를 얻는다. 


  

사실 언제나, 어떤 장르에서나 완전히 새로운 것은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작품이 마음속에 최소 하나씩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존경으로 탄생한 오마쥬는 가장 훌륭한 재해석 방식 중 하나이자 그 옛 작품에 다시 한 번 생기를 불어 넣는 최고의 장작이기도 하다. 


<모비 딕>을 읽으며 고래에 감정을 이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스마엘이 바라보는 거대한 고래 모비 딕은 경이이자 재해였기 때문이다. 모비 딕은 그에게 악역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역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모비 딕으로 인해 가장 가까이 여겼던 벗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지금 <아바타: 물의 길>을 보며 파야칸과 로아크에게 쉽게 감정을 이입해 볼 수 있다. 새로이 생겨난 관계와, 인간이 궁금해하지 않았던 자연이 가진 의지에 대한 묘사는 익숙한 고전의 색채 위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분석했듯이 이런 오마쥬 요소들을 찾아보지 않아도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렇기에 <아바타: 물의 길>이 보여준 재해석과 고유의 메시지는 더욱 생생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물의 길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몇 번씩 반복되는 이 대사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된다. 자연의 순환에도, 폭력과 복수의 고리에도, 가족 간의 사랑에도 시작과 끝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언제 그 길 위로 들어섰는가에 대한 것일 테다. 어디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주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어김없이 영화를 마무리하는 제이크 설리의 단호한 나레이션은 우리에게 또한 결심을 종용하는 듯하다. 이스마엘과 같은 방관자의 위치를 박차고 뛰쳐나오며, <아바타: 물의 길>은 멋진 방식으로 <모비 딕>의 오마쥬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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