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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ke Oct 21. 2021

노 타임 투 다이:크레이그-본드와 헤라클레스의 평행세계

There's just no time to die

*본드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007 시리즈 영화가 처음 개봉된 것이 1962년이었다고 한다. 벌써 59년째 성공가도만 달리고 있는 셈이니 이만한 시리즈 대작도 드물 것이다. 아이코닉한 배럴샷 기법(총열 시퀀스), 단편 애니메이션 퀄리티에 필적하는 오프닝 시퀀스, 개봉 때마다 화제가 되는 주제가와 누구나 들으면 아는 메인 테마 배경음악까지. 이제 제임스 본드는 명실상부한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른 본드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2006년, <카지노 로얄>로 처음 본드가 되었던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제 2021년의 <노 타임 투 다이>를 통해 마지막을 알린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는 언제나 '조금' 달랐다. 영국의 엘리트 신사 같던 기존의 본드와 달리, 그의 본드는 조금 더 거칠었기 때문이다. 화이트 칼라 본드가 블루 칼라가 되었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블루 칼라-생산, 서비스직 노동자. 푸른 작업복에서 유래된 말/화이트 칼라-사무직. 하얀 와이셔츠에서 유래된 말).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 여정에는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엘리트의 면모보다는 보다 마초적인 느낌으로 전해내려오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영웅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며 끝내 신이 되기까지 했으니 영화사의 전설이 될 제임스 본드와도 꽤나 잘 어울리는 비유다. 지략적 면모가 그 압도적인 힘에 가려졌다는 점 역시도. 하지만 크레이그-본드와 헤라클레스의 공통점은 이 외에도 상당히 많다.

크리스토퍼 발츠가 연기한 블로펠드(<007 노 타임 투 다이> 중)

프란츠 오버하우저/에른스트 블로펠드. 해당 캐릭터는 본드의 의붓형제로 등장했고, 결국에는 그를 방해하는 악역이 되어 재등장한다. 본드는 블로펠드의 아버지인 한스 오버하우저를 두 번째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의지했으며, 한스 역시 친아들인 프란츠 오버하우저(블로펠드)와 제임스를 똑같이 아들로 키우며 블로펠드가 제임스를 친동생처럼 여기기를 바랐다. 여기서 크레이그-본드와 헤라클레스의 첫 번째 간단한 공통점이 등장한다. 피가 섞이지 않은 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의붓/이부형제의 존재다. 헤라클레스가 이 의붓형제와 반목했다거나 하는 신화가 특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화가 생기기 쉬운 상황이기도 하므로 다양한 상상을 펼쳐 볼 여지가 존재하는 설정이다.


또한 제우스는 신들의 전쟁, 기간토마키아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필요하리라는 예언에 따라 헤라클레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제우스는 영웅의 어머니가 될 이로 그 자신의 증손녀인 알크메네를 택했으며, 그 운명에 따라 헤라클레스는 신의 피를 절반 이상 타고난 자로서 인간보다도 신에 가까운 영웅으로 빚어진다. 그는 말하자면 올림포스의 최종병기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다른 영웅들에 비해 월등한 강자로 묘사되는 이런 헤라클레스의 설정값은, MI6로부터 00 넘버를 부여받으며 살인면허를 받은 요원들 중에서도 최정예 요원인 제임스 본드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것이 둘의 두 번째 공통점이 되겠다.(*기간토마키아란?-자신의 자식들인 올림포스 신족이 또다른 자식들인 티탄 신족을 타르타로스, 즉 감옥에 가둔 것에 분노한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인해 시작된 대전쟁. 가이아가 만들어낸 기가스 종족과 올림포스 신족은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인간의 힘이 있어야 이기리라는 예언에 따라 헤라클레스를 만들어낸 제우스와 올림포스 신족은 그의 힘을 빌려 승리한다)


타고난 '야만성'에 대한 부분 역시 유사하다. 헤라클레스는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폭언을 한 선생을 때려 죽인 적이 있으며 이로 인해 호적상 아버지인 암피트리온과 친어머니 알크메네는 고민하다 그에게 양치기 일을 맡긴다. 일종의 유배였던 셈. 크레이그-본드 역시 초반에 불필요한 살생을 저지르거나 그 장면의 사진이 찍혀 M에게 매번 혼이 나며, 자숙하라는 둥 단순 징계 처리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요소는 현대인의 시각과 상식에 입각해 보았을 때 명백한 범죄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단점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와 본드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영웅다운 면모로 그려지며, 조금 부드러워질지언정 사라지거나 고쳐지지 않는다. 


헤라클레스와 크레이그-본드의 공통점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인간일 때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단 둘이었다는 것, 첫 번째 아내/첫 번째 연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어서/있다고 여겨서 오래도록 죄책감에 괴로워했다는 것.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저주에 의해 광증에 휩싸인 채로 첫 번째 아내였던 메가라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다. 그 괴로움이 그를 12과업의 길로 밀어 넣은 셈이기도 하다. 그는 마지막 열두 번째 과업인 케르베로스 생포 때까지도 그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한 본드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베스퍼 린드를 구하지 못했고, 그녀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 죄책감과 복수심은 크레이그가 시리즈에서 퇴장하는 <노 타임 투 다이>의 초반부까지 그를 계속해서 휘두른다. 

왼쪽이 에바 그린의 베스퍼 린드, 오른쪽이 레아 세이두의 마들렌 스완.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베스퍼라는 이름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녁별, 즉 밤의 금성을 상징하는 신이다. 새벽을 여는 쌍둥이 신 루시퍼와 달리 어둠을 가져오는 셈이다. 본드가 그녀의 죽음 이후 계속해서 죄책감 속을 헤매야만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이름 선정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그녀의 성인 린드(Lynd)는 그 어원이 Linden tree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ynd의 의미는 Lives by the linden tree라는 해석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Linden tree는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상징하며 신의를 의미한다. 금성이 자주 비너스에 비유된다는 점 역시 재미있는 연관성이라고 하겠다. 물론 작가가 그녀의 이름에 이 모든 의미를 담고자 의도했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베스퍼는 결국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꽤나 의미심장한 상징이 된 셈이다. 크레이그-본드가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더불어 메가라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신전의 내부, 궁전을 의미했다. 헤라클레스는 메가라를 죽임으로써 안식처였던 그의 신전을 파괴하고 12과업의 길로 내던져진다. 그리고 본드는 베스퍼의 죽음을 막지 못하면서 저녁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밤, 즉 죄책감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헤라클레스는 예수와도 평행세계를 이룬다는 관점이 있는데(신과 인간 사이에서 출생, 아버지에게 받은 힘, 죽은 자들을 소생시킨 전적, 죽음 이후 천국/신계로 진입, 12제자와 12과업 등등...)*, 이는 마들렌 스완의 이름 속에 녹아들어 있다. 마들렌의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제자이자 기독교 성인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그 이야기를 널리 전한 이이며 그녀를 예수의 연인으로 여기는 견해들도 존재한다. 본드의 죽음을 목격했으며, 그의 영웅담을 오래도록 전하게 될 마들렌은 막달레나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더불어 막달레나는 아람어로 성, 탑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전, 궁전을 의미했던 메가라의 이름과의 유사성 역시 보여준다. 마들렌의 성인 스완, 즉 백조 역시 베스퍼의 성인 린드와 같이 부부 간의 신의와 사랑을 상징하며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상징이다.


(*유사성은 분명 있으나, 이는 어느 한쪽이 원형 설화가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기에 영향을 받았다가 아닌 평행이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각종 고난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두 사람의 운명도, 맨손 격투만큼이나 원거리 무기인 활/총을 다루는 데도 몹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는 점도, 고난을 겪을 때마다 어떤 여성(들)과 엮인다는 점도, 가끔은 미남계를 사용해 과업을 완수한다는 점도...헤라클레스와 본드의 공통점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하지만 역시 반드시 살펴봐야만 하는,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유의미한 공통점은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되겠다.

두 사람의 죽음은 피에 섞여든 독으로 인해 촉발되며, 불을 통해 종식된다.


헤라클레스는 두 번째 아내인 데이아네이라를 납치했던 켄타우로스 네소스를 활로 쏘아 죽인다. 이때 헤라클레스의 활에는 그가 일전에 해치웠던 괴수, 히드라의 독이 묻어 있었으므로 네소스 역시 그 독에 중독되어 죽어 간다. 네소스는 복수를 위해, 데이아네이라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속삭인다. 후에 남편의 마음이 떠나는 것 같거든, 자신의 피를 보관해 두었다가 그것을 옷에 발라 남편에게 입히면 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데이아네이라는 그 말을 믿고, 후에 헤라클레스가 타국의 공주를 데려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네소스의 피를 옷에 발라 남편에게 보낸다. 아무것도 모르고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네소스의 핏속에 남아있었던 히드라의 독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반신의 몸이었기에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었던 그는, 영원한 고통을 견디는 대신 장작더미를 쌓은 후 스스로 불을 붙여 육신을 태워 없앰으로써 죽음을 맞이한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 크레이그-본드는 두 번째 사랑인 마들렌을 납치했던 빌런, 샤핀과 몸싸움을 벌인 끝에 그를 죽여 승리한다. 그러나 이 몸싸움에서 샤핀이 미리 만들어 두었던, 특정 DNA 보유자와 접촉하면 접촉한 상대를 죽이는 독, 일명 '헤라클레스'를 담아둔 병을 깨뜨리면서 본드는 마들렌과 두 사람 사이에서 난 딸까지 죽이고 말 독에 중독되고 만다. 이를 해독할 방법이 없으며, 영구히 그 효력이 유지될 것임을 확인한 본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 미사일에 의해 곧 폭파될 섬에 남는다. 미사일의 타격과 함께 거대한 폭발 속으로 사라진 본드는 그렇게 불꽃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스 신화의 불은 단순 파괴가 아닌 정화의 속성을 지닌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칠 때도 단순 공양 대신 불에 태우는 절차를 반드시 거쳤으며, 집안의 불씨를 담은 화로를 수호하는 그리스의 헤스티아 여신은 가정 그 자체를 수호하는 것으로 여겼다. 로마의 베스타 여신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녀의 불이 로마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불이 몹시 중요했던 고대 사회의 특성이 명확히 반영된 전승인 셈.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의 손에 의해 불을 전해 받은 이래로, 불은 언제나 신성한 것이었으며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통로와 같이 기능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말하자면, 불이 가진 이 정화의 힘을 이용해 인간으로서 지녔던 육체와 그동안 저질렀던 수많은 살생의 죄업을 정화하고 신의 세계로 진입한다. 인간 세상에서의 죽음 이후,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전쟁에서 맹활약하며 신으로 거듭나고 젊음의 여신 헤베와 결혼하며 완벽하게 신계로 편입되기까지 한다.


크레이그-본드 역시 그러한 결말을 맞이하도록 설계된 셈이다. 가족과 영원히 접촉할 수 없으며 자신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영원한 고통을 견디는 대신 중독된 육체를 불꽃으로 정화한다. 007로서 저질렀던 수많은 살생과 미숙한 시절의 실수들을 태워 없애고, 영화사 속에 제임스 본드라는 아이콘으로서 전설로 남는 것이다(헤라클레스와 달리 크레이그-본드의 사후세계 이야기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노 타임 투 다이>는 중요 소재인 DNA 추적 독극물에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서 상당히 노골적인 평행세계를 완성했다. 많은 관객들이 해당 유사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일까. 작품의 개연성 등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갈리겠으나,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그리고 섬세하게 쌓아온 이 놀라운 신화적 평행세계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뻔한 이야기를 맛있게 그려내기가 가장 어렵다고들 하지 않는가. 신화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꽤나 즐거운 유사성 탐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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