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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JayPark Dec 04. 2020

즐거운 나의 집


나는 은평구 신사동에서 태어났다. 

은평구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여섯 살 까지 지냈는데, TV가 있던 작은 방, 현관문을 열면 원통형 구조의 복도가 있었는데 맨 꼭대기 층이어서 그런지 천장이 막혀있는 구조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앞에서 맨발로 뛰어놀던 기억도 있으니 분명 내 기억이 맞을 것 같다. 가운데 쪽에는 각 집별로 장독대, 혹은 창고 같은 게 있었고 창고에서 아파트 안쪽을 보면 지하 즈음에 있는 시장이 보였었다. 이걸 글로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지만 마치 미래도시에 나오는 아파트 같은 구조였다. 꽤 어린 나이지만 속속 드리 기억나는 구조나 장면들이 꽤 많다.


일곱 살이 되는 해에 우리는 당시 강남구 반포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렇다 그땐 강남구였다) 그 당시 동네에는 주공 3단지와 고속터미널이 덜렁 있었고, 우리는 그 위쪽에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엘리베이터 및 전자장비에 대한 불신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1층에 집을 사셨다. 차를 사실 때도 훗날의 고장을 걱정하시며 창을 직접 돌려 열어야 하는 낮은 옵션의 차를 사셨을 정도였다.

이 아파트는 내가 국민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재수를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미국에 가고, 결혼을 하고, 첫째를 낳는 시간 동안을 계속해서 함께 해줬다. 30년을 넘게 살았던 것이다. 지금도 눈감고 단지 내 놀이터 기구들과 잔디밭을 막고 있던 초록색 철근 구조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주차장으로 변신했던 우리 집 앞 공터의 모습, 어린이날 부녀회에서 열었던 잔치와 우리 동 2층에서 불이 났던 날의 모습들, 비가 오면 우리 동 앞 잔디에 나오던 달팽이들까지 세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몇십 년 간의 긴 기억의 호흡이 주는 '우리 집'은 없을 것 같다.



첫째가 태어날 때에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델리 시티란 곳이었다. 비교적 싼 값에 원베드룸(거실과 더불어 침실이 하나가 있는 구조)을 렌트할 수 있었고, 길 건너에 지하철이 있어서 샌프란시스코로 나가기도 꽤 편했다. 이웃주민들은 주로 멕시칸, 필리피노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모두들 정말 착했다. (정윤이가 태어나 집에 오던 날, 옆집 아주머니는 용돈까지 주셨고, 옆의 옆집 아저씨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불법체류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파트 구조가 신기하게도 내가 어릴 적 살던 은평구의 아파트와 비슷한 원통형 구조였다. 4개 층에 집들이 삥 둘러 있었고, 1층 빈 공간에는 자그마한 정원도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다.


2005년 가을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반포의 아파트로 다시 들어갔다. 30년이 넘은 29평 집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아야 했다. 물론 미국에서 가져온 집은 베란다를 가득 채웠다. 얼마 있지 않아 삼호가든은 재건축에 들어가고, 우리는 사당동의 30평대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그래도 나름 2000년에 지어진 비교적 새 아파트였고, 열심히 살았다. 2009년 에는 이곳에서 둘째 필립이가 태어났다.

사당동의 집은 언덕배기의 꼭대기쯤에 있던 아파트 단지였는데, 당시엔 옛 동네의 정취가 남았었던 곳이었다. 정윤이가 걸핏하면 손을 잡고 가던 문방구가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떡볶이가 맛있었던 분식집이 있었다. 사장님은 아이들에게 엄청 너그러우셨는데, 여름에 직접 우려낸 냉면 국물에 대한 자신감이 많으셨고, 실제로 꽤 맛있었다.


2011년 여름, 이제는 부모님과 우리 네 식구까지 여섯 명이 재건축이 완료된 아파트에 재입주했다.

1980년대 초에 새로 입주했던 곳이 세월을 지나 사라지고, 세 식구가 여섯 식구가 되어 다시 새로 입주를 한 것이다. 새 아파트가 주는 기쁨도 컸고 추억이 서린 동네의 모습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2014년, 우리는 독립을 결심한다. 부모님은 집을 팔고 은평 뉴타운으로 가셨고, 우리는 아이들이 학기를 마치고 이사할 수 있도록 강남에 잠시 월세로 있다가 서울이 아닌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결심하고 2015년 초에 김포에 들어왔다.



당시 김포신도시는 아주 조용했다. 이미 인프라가 형성된 동네는 제법 왁자지껄 했지만, 서울의 교통체증과 사람들에 치어 살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쾌적했다. 처음 선택했던 집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있던 지은 지 2년 된 곳이었는데, 조용하고 한적한 것이 꼭 예전 샌프란시스코의 마지막 집을 연상시켜서 좋았다.

당시엔 미분양도 많아서 정말 지금의 상황에선 생각할 수 없는 금액으로 전세를 들어왔다.(2년 살아보고 다른 곳도 가보자 생각해서 구매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과거로 가서 내 따귀를 때리고 싶은 심정이다)

2015년 여름, 막내 지오가 태어났다. 김포의 첫 번째 집은 우리에게 꽤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가족이 오롯이 함께한 첫 번째 집이고, 막내가 태어났고, 내가 직장을 구했던 곳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다섯 식구가 살며 그즈음 아내와 나 모두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시점이라 더 큰집으로 옮겨야 했고, 2년 계약이 끝나며 우리는 방이 4개인 집으로 새로 이사를 가게 된다.


새로 이사한 곳에서 2년을 살고 집주인의 사업이 잘 안되어 집을 팔게 되며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리고 2년을 살고, 현재 김포는 어떠어떠한 일로 인해서 '금'포가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2년 재계약을 했지만, 아마도 세상 불편한, 불안한 2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과 얘기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은 그때 그 집이다. 2년마다 옮겨온 과거로 인해서 어떠한 시점에 있던 그 집이 어땠다 라고 말할 때, 참 미안하다. 아이들에게는 이미 집은 항상 그곳에 있는 거기. 가 아니라 2년 후에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주인이 따로 있는 곳이다.


앞으로 이사를 얼마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즈음 범람하는 집 찾기, 집짓기 프로그램을 보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만의 집을 짓는 생각도 항상 옵션에 있다. 말도 안 되게 들썩거리는 아파트 가격의 춤을 바라보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물려줄 집의 가격보다는 집의 가치를 생각하고 싶다. 10억, 20억짜리 닭장이 아니라 가격을 생각할 필요 없는 즐거운 우리 집을 주고 싶다.


그저 현실을 피해 꾸는 꿈이 아니길 간절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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