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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JayPark Nov 27. 2020

안녕, 아빠


이 글을 다시 쓰기까지 5개월 정도가 걸렸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일들도 왠지 희미해지는 몹쓸 기억력이 걱정이 되어 아버지가 가시는 길에 대한 이야기는 꼭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싶었다. '아빠가 떠났다'는 사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무작정 노트북을 열고 그 날의 기억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심정으로 타이핑했던 글이다.

글을 쓰면서도 마음은 찢어졌다.

겨우겨우 그 날 아침의 기억을 기록한 것이 내가 몇 달 전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데에는 약 석 달이 걸렸다. 누군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했고, 누군가는 3년이 지났는데도 믿기지 않는 다고 했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때문인지, 숨 막힐 듯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대여서 그런지 3개월 만에 눈물은 멈췄지만, 지금도 본가에 가면 아버지가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조금은 진정된 마음으로 돌아가신 날 아침 그 이후를 다시 기록하려고 한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보신 형사분들이어서 그런지 대단히 상세히 이후에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친절하게 나에게 설명해 주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로 설명해주시던 형사님께서는 나와 어머니의 상태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이제까지 말해주셨던 내용들을 메모지에 차곡차곡 적어주셨다.

세상에서 가장 길게 느껴졌던 3~40분의 시간이 흐르고, 법의학자 분께서 집에 도착하셨다. 집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법의학자 분들이 오셔서 시체 검안을 하고 사인을 기록해야 한다.


추정 사인은 급성심근경색.

사망 추정시간은 새벽 3시경.


새벽 두 시반쯤 아버지가 화장실에 가고 싶으셔서 일어나신 것을 어머니가 보시고 일을 보시게 도와주신 뒤, 물 한잔을 먹이시고 다시 누이셨던 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셨다.

50년을 함께 하셨던 어머니에게, 45년을 키운 아들에게, 손주들에게, 친구들과 동료들과 동생과 누나에게 흔한 작별의 한마디 할 수 없이 86년의 삶을, 잠을 청하시다가 그렇게 가셨다. 사람들은 다행이라 말했다. 아버지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소천이라 말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례식 둘째 날 깨달았다. 결국 그 누구도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생전 가장 긴 기간을 살았고, 당신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반포에서 마지막을 보내드리기로 결정했다.

아내가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연락을 했는데, 때마침 자리가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돌아가시기 전 날 받으셔서 내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던 코로나 19 검사 덕분에 무사히 바로 장례식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병원에서 운구차량이 도착해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나와 어머니는 사고로 조수석 문이 움푹 들어간 내 차를 몰고 강남 성모병원으로 향했다. 오전의 사고 때문이었는지, 정신을 붙잡고 운전해서 강남 성모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먼저 도착해 시신 안치소로 이미 들어가 계셨고, 장례식장 안내에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화장터 선택, 조문실 선택, 사진, 꽃, 조문객에 접대할 음식들을 시작으로 수의, 관까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설명을 듣고 선택을 해야 했다. 따로 상조회에 가입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후의 진행들 또한 모두 나의 몫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소식을 전하고, 몇몇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도 다른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 하면, 아버지 휴대폰에 있던 지인분들, 친구분들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 있다가 깨달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도착했고, 또 울었다. 할아버지와 각별했던 필립이가 많이 울었고, 아직은 상황을 모르는 막내 지오를 첫째인 정윤이가 돌봐줘야 했다. 세 식구가 두식구가 되어 너무 힘들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와주고 난 후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장인 장모님과 나의 친구들과 외갓집 식구들이 속속들이 와주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조문객들이 많이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주었다. 늦은 저녁에는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시는데 내가 보지도 못한 세 남매의 어린 시절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장인 장모님께서 지오와 정윤이를 데리고 가주셨다. 필립이는 남고 싶어 해서다. 첫 번째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보냈고, 아침이 되어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입관식을 하러 갔다.

첫째 날 정신없이 고른 수의를 입으신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병원 모시고 가면서 대충 면도를 해드렸던 기억에 죄송했었는데, 말끔히 면도도 되어 있으셨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는 직원분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또 터지고 말았다. 40여 년을 아무런 생각 없이 마주했던 이 얼굴을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얼마 찍지 않은 사진과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본가에 갔을 때 반기시던 모습도, TV를 보며 꾸벅꾸벅 조시는 모습도, 작별 인사를 하며 서운하지만 웃으시던 모습도 이제 모두 기억으로 의존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결국엔 또 "아빠 미안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의 존재부터 이 모든 상황까지 그저 미안함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 손으로 관에 들어가셨다.


장지를 선택하는 것 또한 문제였다. 가족묘도 없었고, 보러 다닐 가족 또한 없어서 온라인으로 검색해보고 사진을 보고 연락해서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납골당과 수목장 중 어머니와 아내가 원하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김포의 한 수목장을 급하게 계약했다.

발인하는 날, 고맙게도 친구들과 처가 식구들, 친가와 외가 식구분들이 많이 와주셨다. 이른 아침부터 와주신 것이 감사해서 그 날은 손님들 챙기는 것이 여간 바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관이 화로에 들어갔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말 그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작은 통 속에 들어가셨다. 허망했다. 매우 슬펐다.

아버지를 옆자리에 모시고 손을 올렸다. 장지로 가는 내내 뜨거운 온기는 지속됐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처음 뵈었을 때 그 차갑던 손과 얼굴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온도였다.


작은 소나무 분재 앞에 아버지는 그렇게 땅 속으로 들어가셨다.



86년간의 인생이었다.

박연철, 1935년 4월 22일 태어나, 한 때 단성사를 운영하셨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이화학당 선생님이셨던 홀어머니 밑에서 누나와 남동생과 함께 자라나 6.25를 지나고, 동성고등학교, 고려대, 해병대를 나오셨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가셨고, 우리 엄마와 결혼하여 나를 낳으시고, 평생을 중동과 아시아를 두루 다니시며 사업을 하셨고, 일어에 능통하셨고, 술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셨고, 직접 하기도 하셨던 야구를 좋아하셨고, 간장게장을 좋아하셨고, 손주들의 이름을 모두 지어주셨고, 표현은 서툴렀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남자. 2020년 6월 16일 소천.


안녕, 나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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