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그리고 미드 <웨스트윙>
불확실한 시간을 통과 중일 때가 있다.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한계가 있다. 그럴 때 주로 책이나 영화 등을 곱씹어본다. 지나갔던 대사들, 밑줄 쳤던 문장들을 다시 본다. 그러면 처음 지나칠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곤 한다.
#1.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 <논어> 맨 앞장에 나오는 문구다. 사실 너무나도 유명하다. 대략 무슨 뜻인지 많이들 안다. 하지만 오늘 얼룩소 alookso 뉴스레터는 나로 하여금 이 문구를 다시 읽어보게 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 문장에서 ‘때로’, ‘또한’이 눈에 들어온다. 배우고 익히는 게 어떻게 마냥 즐거울까.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쏟아붓는 시간에 비해서 늘지 않아서 막막할 때도 있다.
하지만 ‘때로’, ‘또한’을 넣어서 해석하면 문장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연습하고 시행착오 겪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그것이 진정으로 기쁜 일 아닐까. 어쩌면 마음의 불안과 고통은, 내가 너무 자만한 탓일 수도 있다. 배우고 익히고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쉽고 빠르면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터다. 조금씩 나아지면 된다. 그것에 만족하며 차근차근 나아가자. 공자님이 나에게 건네는 위로 같다.
#2. 미드 <웨스트 윙: West Wing>
코로나 시국으로 본가에 있던 2020년 상반기에 정주행했던 드라마다.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진 드라마다. 현실정치의 교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대사 하나하나에 울림이 있다. 아론 소킨의 역작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시즌2 마지막화다. 에피소드 제목은 <Two Cathedrals>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두개의 성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주인공인 대통령 제드 바틀렛은 독실한 카톨릭교 신자임과 동시에 노벨 경제학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굉장히 리버럴한 성향의 대통령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현실의 리버럴 세력이 어떻게 권력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예시이기도 하다.
시즌2 말미에 여러 어려움이 동시에 바틀렛을 집어 삼킨다. 본인에게 용기와 신념의 중요성을 처음 불어 넣어준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자 부속실 비서였던 랜딩험 여사가 교통사고로 급사했다. 다발성 신경경화증 투병 사실이 폭로되어 탄핵 위기에 처했다. 부통령이자 잠재적 경쟁자인 호인스 상원의원은 은근히 바틀렛 대통령의 불출마를 종용하는 상황이다.
독실한 신자였던 바틀렛이 성당에서 신을 향해 도전하는 장면이다. 혹자는 이 장면이 미국의 20세기 대중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연기라고도 한다.
모욕적이지도 않고 불경하지도 않다. 감정적인 화에 휩싸여 요란하지도 않다. 그 대신, 예측 불가능하고 부당한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 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조물주 앞에 하염없이 작아지는 게 인간이라지만, 탁월한 개인은 이를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한다. 겸손하되 굴종하지 않는다. 기꺼이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https://youtu.be/dVgK5HKj3P4 (해당 장면 링크)
다음은 인상적이었던 대사들을 의역한 부분.
“당신이 너무 X같이 굽니다. 알고 있습니까? 그녀(랜딩험 여사)는 평생 모은 돈으로 첫 차를 샀습니다. 그런 사람을 음주운전한 망나니 차에 치여 죽게 하다뇨. 이걸 운명의 장난이려니 하고 웃어 넘겨야 합니까? 그래이엄 그린은 “너는 알지 못한다. 나도 알지 못한다. 그저 신의 자비가 신비함을 알지어다.”라고 합디다. 누구한테 아첨 떠는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당신은 그저 복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치기 같네요.
조쉬 라이먼한테는 또 왜 그런 겁니까? “신의 경고”라고 떠들어대는 게 고작 이런 겁니까? 그 애는 내 아들과도 같은 녀석입니다. 나는 당신 아들에게 신심을 다짐하고 매일 3번씩 기도합니다. 내 믿음이 부족했습니까?
(중략)
작년 이맘 때 대서양 부근에서 당신은 미국인들이 타고 있는 보급정비함을 뒤집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오늘이 가장 강력한 태풍이랍디다. 그날 68명의 선원이 죽었어요. 보급정비함이 뭔지는 알고 그런겁니까? 다른 배들을 수리해주고 도와주러 떠다니는 배입니다. 총도 없고 무기도 없고 그저 우편들을 실어 나를 뿐이었습니다.
(중략)
이 빌어먹을 XX야, 아직도 내가 그렇게 당신한테 못 미더운겁니까? 첫 임기 동안에 38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었고, 멕시코를 금융구제했고, 무역수지도 늘렸고, 3천만 에이커의 땅을 환경 보존했습니다. 테러리스트를 제거했고 전쟁을 막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부족합니까?”
뒤이어 폭풍간지 씬이 나온다.
바틀렛 대통령 일생일대 최대의 일탈이었던, 고등학생 시절 예배당에서 몰래 담배 핀 일을 재현한 거다. 예배당 한가운데에 담배꽁초를 구둣발로 비벼 끈다. 그리고 나오는 한마디.
“당신은 늘 그랬듯이 호인스나 싸고 도십쇼. 나는 내 갈 길 갑니다.”
여기서 담배꽁초와 멘트는 복선이 된다. (스포주의) 당연히 사퇴 기자회견일 줄 알았던 자리에서 당당히 재선 출마 의사를 밝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란, 인간이란, 정면돌파를 이렇게 숭고함에 이를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보면 볼수록 전율이 돋는 장면이다. 내면에 용기가 샘솟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