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tekeepers>를 읽고
지난 대선 직후에 브런치 플랫폼에 “윤석열 당선인께 올리는 책”이란 글을 썼다.
이제 ‘당선인’은 ‘대통령’이 되셨고 이미 2달 가까이가 흘러갔다. 100일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타임라인(이슈의 흐름)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뉘는 것 같다.
‘내각 및 대통령실 인선’ -> ‘약식 도어스테핑과 용산 집무실 출퇴근’ -> ‘정상외교를 통해 나타난 일련의 가치 지향성’ -> ‘부인 김건희씨 논란’ (현재진행형)
이 글에서 해당 논란들을 모두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다. 통상 대통령의 첫 100일은 전체적인 임기를 좌우하는 리트머스 종이다. (‘루스벨트의 100일’ 참조) 100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 말고도 3개월 동안 소위 ‘허니문’이라 하여 언론과 여론의 각별한 이해심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윤 대통령의 100일은 분명 자중지란이었다. 이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드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비서실장 이름을 아는 분이 계신가? 설령 아신다면, 그 분의 행적이나 발언이 언론에 등장한 게 마지막으로 언제인지 아시는지?
(찾아보니 현직 김대기 대통령실장은 관료 출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청와대 행정관부터 수석비서관, 그리고 정책실장직을 모두 경험한 바 있다고 한다.)
지난 몇일 간 대통령실에서 나오는 메세지와 공보용 사진들 그리고 대통령의 워딩 등은 전혀 정제되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안병진 교수님이 모 언론 인터뷰에서 추천한 책 <The Gatekeepers>를 찾아서 읽어볼 결심이 섰다.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라서 영어 원서로 읽어야 했다. 일대기적 구성이고 리얼리즘 소설과 같은 느낌이라서 다행히 크게 어려움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The Gatekeepers> 표지
이 책은 작가 Chris Whipple이 사료들과 관계자 인터뷰를 취합하여 일대기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후일 저널리스트로서 꿈이 있다면 이 책과 같은 정치현장 분석서와 스토리를 한 권의 책으로 집필하는 것이다.)
제목부터 눈에 띈다. ‘Gatekeepers’라 하여, 백악관 비서실장들의 본질적 역할을 ‘문지기’로 본 것이다. 비서실장의 임무는 정책적 우선순위 설정과 정치적 균형감각과 어젠다 설정이다. 즉, 대통령에게 올라갈 사안들의 옥석을 가려서 전체적인 균형감을 유지하는 일이다.
첫 챕터에 닉슨 대통령의 비서실장 Harry Haldeman부터 하여, 가장 마지막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비서실장 Rahm Emmanuel까지 등장한다.
#1.
가장 인상 깊은 챕터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 James Baker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James Baker를 독일 통일 당시 소련과 담판을 성사시킨 국무장관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는 레이건 행정부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독일 통일 당시 소련 측에 그 유명한 ‘나토의 경계선 은 단 1인치도 안 움직일 것이다.’라는 구두합의를 해 준 장본인. 그 당시 KGB 동베를린 지부 실무자가 푸틴이었다. 역사는 돌고 도는데 그 안의 인물들도 돌고 돈다.)
더 특이할 만한 사실은, 그가 ‘레.핵.관’ 이너서클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할 때 형성된 ‘캘리포니아 라인’을 핵심 포스트에 두고 있었다. 일사분란한 조직 운영이 필요한 선거 캠페인 당시에는 유용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늘 그렇듯, ‘당선 이후’다. 워싱턴의 시각에서 레이건은 ‘배우 출신’의 ‘비주류’이며 서부 변방에서 온 ‘원내 경험’이 없는 인기영합적 대통령이었다. 이런 불신의 눈초리를 불식시킬 필요성이 컸다. 그에 따라서 당시 공화당 캠페인 매니저였던 Stuart Spencer는 레이건 당선인에게 고언을 하고, 레이건은 추천된 인물 중 Baker를 흔쾌히 선택한다.
(Baker가 레이건에게 첫 초대를 받고 만나는 장면 묘사가 압권이다. 레이건 특유의 서글서글함과 카리스마가 문자만으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Baker는 오히려 공화당보다 민주당의 정치노선에 더 가까울 정도로 중도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고, 선거 과정에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내세우는 ‘개국공신’도 아니었다. ‘레.핵.관.’들의 불만은 불 보듯 뻔했다.
이런 불만을 일시에 교통정리한 것은 단연 레이건 대통령 본인이었다. (+ 낸시 레이건 여사의 역할도 컸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문장이 나오는데, 의역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카터는 정치가 운영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반면 레이건은 정반대였다. (중략) 기초적인 연방정부 운영 원리도 낯설어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정치 자본과 위치 감각에 대한 ‘이해’는 탁월했다.”
그는 정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워싱턴 이너서클의 문법을 통달한 인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생래적으로 그것이 본인의 부족한 측면을 보완할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 비서실 참모들이 등장하는 FPS 게임 “Call Of Duty” 튜토리얼 장면. 비서실장 James Baker, 국무장관 Alex Haig가 나온다. https://youtu.be/bm8otf2zHiU)
#2.
숱한 반대를 뚫고 대통령비서실장이 된 Baker는 ‘레핵관’들과 적절한 타협을 통해 비서실 내 역할 배분을 신속하게 마친다.
본인이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내용과 메시지, 연설문 내용을 전담하고, ‘레핵관’ 출신들에게 국내정책과 국가안보 분야를 각각 맡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Baker가 타협을 이뤄낸 방식이다. 언뜻 보기에 그는 레핵관들에게 근사한 명함과 역할을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통령에게 들어가는 정보와 정세 판단을 최종적으로 마킹하는 것은 결국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백악관 이력을 밑천 삼아 다음 선거 혹은 유수의 로펌 등 직장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려는 ‘레핵관 계파’의 이해관계를 간파했던 것이다. 노련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이후에도 Baker는 ‘레핵관’들의 견제와 강경 반공 이념으로 무장한 군부 엘리트 출신 외교안보 보좌진들의 ‘패싱’ 논란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레이건 직전의 미국 대통령의 위상은 암살, 전쟁의 수렁, 인플레이션, 초유의 중도 하차 사태 등을 겪으며 엉망이었다. 이 수렁에서 레이건이 처리해야할 국정과제의 우선순위(스태그플레이션에 몸살을 앓던 경제위기 극복, 후기 미소 냉전 대치)와 효율적인 조직 운영 방법을 수립한 것은 단연 Baker의 공이었다.
이후 비서실장직에서 사퇴하고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미국 재무장관과 국무장관에 연이어 지명된다.
(재무장관 재직 당시에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를 주도했다. 흔히 2차 대전 전후 세계질서의 기획자로 헨리 키신저를 꼽지만, 오늘날 세계질서의 경제/외교안보 기틀을 마련한 건 오히려 이 분 아니었을까 싶다. 플라자 합의와 독일 통일을 모두 실무적으로 담당했으니까..)
#3.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권력자라 해도, 권좌에 앉아있는 그는 끊임없는 스트레스 상태에 놓인다. 그 스트레스의 요체는 “내가 가진 힘의 영향력이 상대에게 관철되지 못하고 좌초되면 어떡하지?”와 같은, 의외로 소심한 걱정이다.
그러나 이 조바심을 제때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권력은 스스로의 무게에 취해서 고삐를 풀게 되고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이 만들어내는 공백에는 어김없이 아첨꾼들과 예스맨들이 권력자 주변을 에워싼다.
결국 이런 조바심을 냉철하게 직시하여 속도 조절을 주문할 수 있는 ‘균형 감각’과 절대권력자가 듣기 껄끄러워할 판단과 정보를 객관적으로 전할 수 있는 ‘강단과 용감함’을 갖춘 ‘Gatekeeper’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론
그 어느 대통령도 순탄한 상황맥락에서 출발한 적은 없다. 지난 5년이 보여주듯이 너무 순탄하고 편안한 정치 환경은 오히려 권력의 절제감을 망각시키기도 한다.
결국 ‘줄탁동시’다. 안에서 알을 쪼는 사람과 밖에서 그걸 돕는 사람이 합을 맞춰야 하듯,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카리스마와 진취적인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권력자와, 곁에서 그의 균형감각과 절제력을 유지하게 도울 ‘문지기’가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께서 대통령실 주변의 난맥상을 진단하시고 그 처방을 내리는 과정에서 꼭 참고하셨으면 하는 책이다. 하루 빨리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되길 고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