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지혜 Nov 06. 2023

프롤로그

약사 엄마가 딸에게 쓰는 편지

나에게는 초등학생 딸이 하나 있다. 아기 때 보송보송한 병아리 같기만 하던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자기만의 세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튜브 ‘먹방’을 흉내내거나 아이돌 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난해한 패션과 머리모양으로 등교하기도 한다. 또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내가 알 수 없는 내용이 태반이다. 딸이 자라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세계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자신만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딸


딸이 커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대견하다. 마냥 떼쓰는 어린 아기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끔 울적한 엄마를 의젓하게 위로해주기도 한다. 병아리가 자라서 엄마 닭의 날개 밑을 빠져나가 넓은 세상을 알아가려 한다. 이럴 때 엄마의 역할이란 ‘나도 한때 저랬겠지’ 하며 그저 지켜보는 게 전부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는 딸과의 접점을 많이 만들고 싶었다. 이대로 딸이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에는 뭔가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딸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딸아, 엄마도 여기 있어’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한 번이라도 더 나를 쳐다봐 줄 것 같아서다.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는 어떨까? 나는 상처에서 나오는 빨간 피와 상처가 아물어 생긴 딱지를 보면서 핏속에 들어 있는 백혈구가 우리 몸을 어떻게 멋있게 지키는지를 이야기했다. 또 진화론에 대한 과학책을 일부러 꺼내 와 함께 읽으면서,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해 가는 (시각적으로 다소 충격적인) 인류 진화의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과학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피 사총사(출처=Britannica)


그런데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엄마가 약간의 과장을 섞어 조금씩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는 아이의 집중력을 붙잡아 두기가 영 어려웠다. 나의 야심 찬 과학 강연은 잠들기 직전 침대맡에서 시작해 겨우 20분이면 끝나곤 했다. 이야기가 금세 옆길로 새거나 아이가 잠들어버렸다. 과학적 사실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려주기 위해 온갖 비유를 동원해 봤지만 나의 빈약한 상상력과 어휘력에 좌절하기 일쑤였다. 나는 다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딸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줄 수 있을까?     


엄마와 딸이 나누는 과학 이야기에 대한 영감을 준 책, <불량엄마의 생물학적 잔소리> (출처=궁리출판)


그러다 우연히 <불량엄마의 생물학적 잔소리>라는 책을 알게 됐다. 엄마가 사춘기 딸에게 하고 싶은 말(딸에게는 ‘잔소리’)에 생물학 지식을 쉽게 녹여 낸 과학서다. 사춘기 딸을 키우는 어려움이 묻어나는 육아서 같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딸을 키우는 동료로서의 애환(?)이 느껴진다. 책의 저자인 송경화 박사는 딸이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하는 이유,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 등에 대해 자세하면서도 친절하게, 때로는 시크하게 생물학적으로 설명한다. 딸은 엄마가 하는 이야기가 처음에는 잔소리처럼 들렸지만 결국 그 이야기를 통해 생물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저자는 ‘불량엄마’를 자청하며 자신의 전문분야인 생물학을 도구 삼아 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곤조곤 건넨다. 그런 저자의 이야기 방식을 나도 빌려보고 싶었다. 약학을 오래 공부한 내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 도구는 역시 ‘약’이면 좋을 것 같았다. 약에 대한 쉽고 재미있는 지식을 도구 삼아, 인생을 먼저 살아본 선배로서 얻은 지혜를 딸에게 건네주고 싶었다.    

 



엄마는 약이 잘 만들어졌나 알아보는 사람이야.

딸은 나의 직업을 이렇게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약사 엄마가 십수 년간 식품의약품안전처 연구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것도, 그리고 지금은 제약회사에서 품질보증 업무를 하는 것도 저렇게 요약할 수 있다. 엄마가 아침에 집을 나가 저녁 늦게까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가끔은 궁금할 것이다. 그런 딸에게 내 직업은 딱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됐다.     


약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아주 오래전 버드나무 잎을 씹어 통증을 다스리던 시절부터 딱 한 번 치료로 유전병이 낫는다는 수십억 원짜리 유전자치료제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많은 약이 탄생해 왔다. 약이 몸속에서 치료 효과만 딱 내고 사라지면 좋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모든 약은 ‘치료효과’와 ‘독성’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걸 알게 되기까지 참혹한 부작용을 댓가로 치르기도 하면서, 인류는 수많은 질병에 대한 치료제를 찾아내고 만들었다. 그 결과 건강하게 백 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인조차 모르는 난치병이 많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밤을 새워 가며 왜 병이 생기는지,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이유다. 질병의 원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 수준에서 밝히고, 그 부위에 정확히 들어맞아 부작용 없이 치료 효과를 내는 ‘마법의 탄환’을 찾는 것이 전 세계 약학자들의 공통된 연구 과제다.

     

나는 그 연구의 드넓은 바다 언저리에서 모래알만큼 작은 조각을 주워 맛보았을 뿐인데도 그 오묘함과 신묘함에 매료되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딸에게도 해주고 싶었다. 살다 보면 한 번쯤 맞닥뜨리는 질환과 그에 맞는 약이 있다. 인생의 특정 시점에만 필요한 약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약은 평생에 걸쳐 만난다. 여성이기 때문에 만나는 약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단 한 번도 만나서는 안 되는 약도 존재한다. 딸이 일생을 살면서 만날 약에 대한 상식을 재미있게 알려주면 앞으로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약 이야기에 덧붙여, 딸에게 해주고 싶은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담으려고 한다.     




나는 아직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갈 길이 멀다. 일하면서 엄마 노릇까지 하며 산다는 것이, 내 깜냥으로는 영 쉽지가 않다. 부족한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아이도 잘 키우고 스스로도 잘 클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그런 내가 딸의 건강한 삶을 위해 잘 할 수 있는 일은, 그간 공부해 온 ‘의약품’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광의 박사졸업식날, 딸과 함께

나 역시 우리 엄마의 딸이고 어릴 때 엄마에게서 배운 인생 지혜를 마음에 새긴 채 살고 있다. 마흔 살인 지금도 잊을 만하면 어릴 적 엄마 잔소리가 생각나 마음을 다잡곤 한다. 모든 엄마들은 딸의 인생 최고 선배다. 나 또한 한 명의 인생 선배가 된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우리 모녀뿐 아니라 세상 모든 딸과 엄마들이 백 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데 나의 글이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좋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