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의 입관을 지켜본 적 있다. 죽음이라는 것조차도 제대로 모를 나이었다. 할아버지는 평소 아주 건강한 분이셨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부엌으로 나가던 중 갑자기 넘어져서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12월의 끝자락 눈보라가 세차게 휘날리던 추운 겨울이었다. 땅은 꽝꽝 얼어붙어 곡괭이가 튕겨 나올 정도였고, 아빠와 친척들은 눈바람과 맞서며 관을 묻을 땅을 열심히 팠다. 그리고 새해 첫날, 신정에 쓰려고 빻아온 쌀가루는 제사 떡이 되어버렸다.
어른들은 우리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아버님 참 복 받게 돌아가셨어”라고. 당시 어린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복 받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보통 연세가 있으면 지병으로 앓다가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은 것에 비해 갑작스럽지만 그래도 고통 없이 건강하게 잘 살다 가셨다는 뜻이었다.
당시 할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피가 흥건한 모습, 눈을 뜨고 돌아가신 모습, 무엇보다 입관 전에 치러지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난 후 나는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언젠가 나도 그 관속에 들어가게 된다고 상상하니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조여오듯 숨 막히고 너무 공포스러웠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관속에 안치하고 관에 못을 박을 때 나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소리도 못 내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어린 나이에 목격한 죽음은 나에게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나는 죽고 싶지 않다며 어머니에게 떼를 썼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어머니의 대답에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그때부터 나를 강하게 키우셨던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잘 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조금 더 일상에 감사하게 되고 결코,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평범하지만 평온한 하루에 감사하고 또 잘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질지언정 말이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도 함께 시작된다. 즉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갈 때가 많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나의 인생을, 나에게 주어진 일상을 헛되게 보내진 않을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잘 준비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사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음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행복한 삶이었던 불행한 삶이었던 이 세상에 태어나 몇십 년을 살았으면 신이 주신대로 명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도리이고 죽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