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탁상시계 하나가 삐비비빅하고 울면 할머니가 눈곱을 떼고 일어나 그 자리에 앉아 하루를 시작했다. 아직 꿈속을 헤매던 나는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달그락 거리는소리에 '벌써 아침인가'하고 설핏 잠에서 깼다가 다시 스르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할머니의 하루는 밥에서 시작해 밥으로 끝났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은 뭘 해 먹지?' 하고,점심을 먹고 나면 '냉장고에 저녁 먹을 만한 게 남아 있나?' 하며 다음 끼니를 염두에 뒀다.할머니가 하는 얘기는 모두 밥에 대한 얘기였고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지금 먹을래?""밥을 왜 안 먹어." 셋 중 하나였다.
사춘기가 한창일 무렵. 별일도 아닌 일에 '짜증 나'를 입에 달고 살던 나에게밥 먹었냐, 밥 먹어라 소리는가장 듣기 싫은 잔소리였다.밥 한 끼 안 먹는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졸졸 쫓아다니며 그놈의 밥밥밥밥.할머니가그럴수록오히려 반발심만 커져서 밥의 'ㅂ'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고팠던 건 밥이 아니었는데……. 방학숙제로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라는 가족 신문을 만들어야 할 때 엄마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었다. 없는 엄마를 거짓으로 있다고 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엄마의 부재를 친구들 앞에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었다. 30분째 빈 종이 앞에서 고민하던 내 모습을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미술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얼굴을 그리는 시간에다른 친구들은 자기 엄마 사진을 들고 왔는데 나는 엄마 대신 고모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라도 짝꿍이그 사진을 보고 "야, 너는 어떻게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냐" 하면서 관심을 가질까 봐 4B연필로 슥슥 스케치를 하면서도 온 신경은 주변 친구들을 향해있었다. 그날은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가 톡, 하고 나를 건들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짜증을 쏟아낼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런 나의 침울한 얼굴 앞에 밥상을 불쑥 들이밀었다(우리 집은 소반에 상을 차려서 안방으로 상을 옮겨 먹었다).고모사진을 왜 가져갔는지 뻔히 다 알면서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밥 먹어라'가 고작인 게 화가 났다. 내가 원한 건 이깟 밥상이 아니라 온기 있는 말 한마디였는데……. 어깨 한번 토닥여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런 시간들을 몇 번 경험하면서 '우리 할머니는 밥 차려주는 것 말고는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렸고할머니를 향한 나의 태도 역시 차가운 무관심으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할머니와 큰 소리를 내며 부딪친 적이 있었다.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와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며 바락바락악을 썼다.그럼 할머니도 내게 삿대질을 하며 평소처럼 욕을 할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내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날따라 할머니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퍽퍽 때리더니 "아이고!내가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쓸데없이 오래 살아가지고! 쥐약이라도 먹고 콱 죽어버릴걸." 하며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고는가스레인지 쪽으로 홱 돌아앉아 소녀처럼 뜨거운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내가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는내가받은 상처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는 원치 않게 태어난 애라는 둥. 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네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둥.'아, 나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구나'라는 생각으로 몇 날며칠을 가슴앓이 했던 건 다 할머니 때문이었다. 어린 나를 씻겨주던 엄마가 "어머니. 저는 혜원이가 예쁜 줄을 모르겠어요." 라며나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다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얘기였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내 속을 뒤집어 놓던 할머니가, "내가 한 번만 더 그러면 사람도 아니다. 그땐 진짜 내 입술을 꿰매어버릴 거야." 하면서 또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하던 할머니가, 이번엔 며칠 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러다 혹시 할머니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떡하지?' 안 하던 쥐약 얘기를 요새 들어 두 번이나 했던 터였다. 평소처럼 TV라도 보면 별거 아닌 일로 웃다가 그날 일을 잊어버릴 만도 했건만 할머니는 좋아하던 TV마저 등지고 돌아누워계신다. 종일 벽만 보고 누워있으니 눈을 감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 우시는 건지 주무시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돌아누운 할머니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죄송하다는 말이 목에 까슬까슬하게 걸려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는 사이며칠이 또 지나갔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밥 먹을 거야?"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에게 물었고 나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응. 먹을 거야." 하고 대답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책가방을 벗으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우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늘 빨간 의자 위에 앉아계셨다. 할아버지가"이 여편네야. 모르면 가만히나 좀 있어"라며 핀잔을 줄 때도,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밤낮없이 술사 오라며 소리칠 때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손녀딸이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대들 때도, 할머니는 늘 그 자리에 앉아계셨다. 가사노동의 고단함을 알아줄 리 없는 식구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해도 그 자리가 틀림없는 제 자리인양 언제나 거기에 앉아계셨다.
내가 둘째를 낳고 나서 산후우울증을 겪을 때,베란다 청소를 하다가문득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는 편지 한 장 남겨두고 이 집을 훌쩍 떠나버릴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숨어 살면지금보다는쉼 쉬기가 편해질까?
밤이 되면 억눌러두었던 우울감을 꺼내 들고집 밖으로 나갔다. 어떤 날엔 한강으로어떤 날엔 동네 구석구석으로.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걷고 또 걸으며 나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두었다.
높은 곳에 가면 속이 후련해질까?등산화도 등산 스틱도 없이 맨몸으로 새벽 산행을 시도했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떠서 새벽이지만 한밤중처럼 깜깜했고 가로등마저 꺼져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핸드폰의 손전등 불빛뿐이었다. 얼마쯤 올랐을 때, 내가 내지 않은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리면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몸이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갑자기 마주치기라도 하면 등골이 오싹해져서 '살려주세요'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밤마다 방황하며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다.있어야 할 곳에 있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자리가 이다지도 힘든 자리였단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할머니라고 나처럼 도망치고 싶던 순간이 없었을까?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에서 할머니와 함께(아쉽게도 의자 사진은 찾지 못했다)
할머니가 해준 건 (밥 말곤)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는데 엄마가 되고 보니 내가 틀렸단 걸 알게 됐다. 할머니가 없었다면 밤새아빠의 술주정을 들어주는 일은 내 몫이 됐을 테고, 장을 보고요리하는 것 모두 내 일이 됐을 것이다. 마음껏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할머니가 그 자리를 지켜주신 덕분이었다. 하루 세끼를 챙겨준 게 할머니가 해준 전부라고 폄하했지만, 그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해주신 거였다.
유일하게 입맛이 돌았던 어릴 적의 토요일. 4교시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현관문을 열자마자"오늘은 비빔국수 먹고 싶어요."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할머니는 끓는 물에 소면을 삶고양념장에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주셨다. 마지막으로 참기름과 깨소금까지 뿌리고 나면 "다 됐다. 빨리 나와라. 이거 면이라서 금방 불어"하고 나를 재촉하시던 할머니. 빨간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계시던,그 시절 나의 할머니.
이제야 비로소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사랑을 알게됐다. 아이들을 위해 미역국을 끓이는 오늘. 숟가락으로 냄비 속을 휘휘 젓던 할머니의 굽은 뒷모습이 생각나는 날이다.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그땐 제가 할머니를 위해 맛있게 요리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