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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Apr 11. 2023

자판기가 제 돈을 먹었어요!

낮은 자존감의 구멍(opening)- 작은 실천의 중요성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한다.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책 냄새를 맡고 있으면 '현자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거기서 피톤치드가 나올 리 만무하지만, 어쨌거나 치유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서관에 갈 때면 읽을 책을 미리 정해놓고 가는 편이다. 원하는 책을 서고에서 찾은 뒤에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주변에 있는 책들도 쭉 훑어본다. 볼만한 게 또 있을까 싶어 보물찾기 하듯 책 제목을 훑어내려 간다.


그날은 심리학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들른 날이었다. 평소처럼 주변 책들을 살펴보다가 시선을 사로잡는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됐다. 「나에겐 분명 문제가 있다」라. 아주 도발적이고 직설적인 제목이었다. 나에겐 어떤 문제가 있을까.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 목차를 천천히 훑어보다가 그중에서 내 얘기다 싶은 곳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눈앞에서 뻔히 새치기를 당해도 아무 말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어느 정도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자신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느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p.22)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불합리한 대우에 민감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한다.(p.23)

우선 자신의 욕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데 익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p.23)

(출처: 데이비드 J. 리버만, 나에겐 분명 문제가 있다(창작시대))


저자의 주장은 명확하고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한 대우를 당할 때에도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대충 넘어갔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어 '소란 피우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혼자 낑낑대며 자책하고 후회할 때가 많았다. 나보다 남을 우선시했던 거였다. '진짜 내 모습'보다 '남의 시선에 보이는 내 모습'을 더 신경 썼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다.  




조금씩 졸리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셔야겠단 생각이 들어 2층 휴게실로 향했다. 자판기에는 200원짜리 '일반커피'와 300원짜리 '고급커피'가 있었다. 평소에 일반커피를 마셨지만 오늘만큼은 나에게 고오급 커피를 선물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미안했다는 사과의 의미를 담아서.


500원짜리 동전을 자판기에 넣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빨간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선택 가능한 메뉴에 불이 들어와야 하는데……. 동전이 다시 내려왔나 싶어 투명한 플라스틱 구멍 속을 만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자판기가 내 돈을 먹어버린 것이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자판기 옆에는 '고장 시 불러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지만, 고작 500원 때문에 누군가의 주말 아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500원 가지고 오라 가라 하는 게 민폐처럼 느껴졌다. 다른 층으로 갈까. 한 층만 더 올라가면 거기에도 커피 자판기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그냥 지나치기 찜찜했다. 나한테 분명 문제가 있다고 저자에게 혼구녕(?)난 직후였고, 스스로도 그 문제를 인정한 상태였다. '자신의 욕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데 익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뇌리에 맴돌았다. 이대로 덮어둘 것인가 vs 한 단계 성장할 것인가. 피할 수 없는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고민이 됐다. '1,000원도 아니고 500원인데…….'라는 생각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1,000원이면 바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500원은 뭔가 좀 애매했다. 그러다가, 이대로 넘어가면 내 뒤에 올 사람, 그다음에 올 사람들도 똑같은 일을 마주하게 될 테고 그들 역시 같은 고민에 빠질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전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뚜르르르. 별것도 아닌데 심장이 떨렸다. (차라리 안 받았으면!)

찰칵. (안돼! 받아버렸어!)

"여보세요."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아, 여기 ㅇㅇ도서관인데요. 2층 자판기에 돈을 넣었는데 커피가 안 나와요. 다른 버튼 다 눌러봐도 안되고 아예 빨간 불이 안 들어오네요. 돈을 먹었나 봐요."

"얼마 들어갔어요?"

"…500백 원이요." (이때 잠깐 부끄러웠다)

"네. 곧 갈게요. 15분 정도 걸려요."


휴. 무사히 통화를 마쳤다. 15분은 생각보다 길었다. 책을 가지러 갔다 올까 생각해 봤지만 괜히 길이 엇갈릴 수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꼼짝 앉고 기다렸다. 가만히 있다 보니 또 긴장이 됐다. 그분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진 않을까. 별거 아닌 일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한다고 눈치를 주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도 지 말아야지! 500원도 돈인데! 내 걸 당당하게 주장하는 연습이 필요해! 그렇게 혼자서 결연한 다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사람들이 자판기에 돈을 넣으려고 하면 "아, 그거 고장 났어요. 지금 수리해 주러 오신대요."라고 설명하고 다른 층에 있는 커피 자판기로 안내해 드렸다. 그걸 세 번쯤 반복하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분이  오셨다!


오자마자 "아이고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라며 나를 멋쩍지 않게 해 주셨다. 쫄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다행히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신 김에 자판기 세척까지 해주셔서 더 깨끗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에겐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그중에 작은 언덕 하나를 넘긴 것 같아 뿌듯했다. 나는 500원을 돌려받았고 고오급 커피를 평소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성장의 맛은 참 달콤하구나! 커피 한잔만으로도 한껏 자랑스러워진 토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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