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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May 19. 2023

모성애보다 위대한 사랑

모성애에 대한 구멍(opening)-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잘 지내? 사진 보니까 애들 많이 컸."

"응. 지금 7살, 5살이야. 많이 컸지."


친구는 아기를 가지 노력는 중이라 다.


"사실 고민이야. 애를 낳아도 될지. 나 원래  낳는 거에 대해 회의적이었. 어렸을 적에 우리 마 아빠가 맨날 싸워."

 

그 마음이 어떨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아이를 가져도 될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오랫동안 고민했었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혼하셨다. 그 후로 엄마는 연락이 끊겼고 양육비 몇 번 보내다 말았다. (어릴 때의 나는) 엄마에 대해 는 게 없었다. 진 한 장 남아있 게 없었, 어디에서 뭘 하며 살고 있는지, 살아계시긴 한 건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게 된 소식은 '엄마가 재혼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던 내가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다. 모두에게 축하받을 만한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엄마 없이 자란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막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여 잠 못 이룰 때도 있었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와도 자주 부대꼈기 때문에 사랑받고 자란다는 어떤 느낌인지 체감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 모성애라데, 우리 엄마는 왜 연락 한번 없었을까? 내가 어떻게 크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을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 그래서 더 '모성의 대물림'이라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닮고 싶지 않아도 닮게 되는 게 모성의 대물림이라면, 나도 그렇게 무심한 엄마가 될 수도 있는 걸까?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사랑을 줄 수 있는지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를 품은 나는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품에 안아보니, 걱정했던 수많은 밤들이 무색해질 만큼 아기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던 엄마들의 이야기가 나도 이해가 됐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를 버리고 간 엄마와 다르다는 것을. 엄마는 엄마, 나는 나였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모성의 대물림이란 것도 절대 불변의 진리는 아니었다.  


온 세상이 잠든 새벽이 되면 아이의 숨소리가 더 잘 들렸다. 엄마가 됐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다가도 아이의 말랑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다 보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하 막연한 안도감 들었다. 매일 아이를 안고 아이와 눈을 맞추면서도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엄마가 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빈틈이 듬성듬성한 삶을 살았던 내가 이렇게나 밀도 높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다.


"아이를 낳기 전엔 나도 엄청 불안했었어. 잘 해낼 자신도 없었고. 그런데 상 낳아보니까  키우는 게 진짜 힘들긴 한데 그만큼 행복하기도 . 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오히려 애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주는 것 같. 이런 사랑을 받아보니까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걸 느껴."


어쩌면 아이가 나를 키워주는 것 같다. 엄마로 자라 갈 수 있도록.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작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이 쪽이었다. 아이는 마치 나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 내가 잘났든 못났든 나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내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줬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내 부도, 연인조차도.


아이는 내 실수까지도 그러이 용납해 줬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똑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해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만 하면 "괜찮아. 엄마 사랑해." 하고 웃으며 를 꼭 안아줬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잘못을 잊어줬는데, 그건 '없던 일로 해줄게'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자책하는 나를 향해 "엄마는 예쁜 꽃이야"라며 자꾸만 나를 사랑해 줬다. 처음처럼 똑같이, 아니 어쩌면 점점 더 많이.


아이는 지금도 매일 사랑을 고백한다. 옷을 갈아입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엄마 사랑해."

"응. 엄마도 사랑해."

내가 핸드폰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자, 아이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엄마. 진짜로 사랑해. 우주까지 로케트만큼 사랑해.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는 공주님처럼 예뻐."


이렇게나 사랑해 주니 엄마의 사랑도 자랄 수밖에 없다. 예전엔 모성애가 있어야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건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모성애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키가 크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자라 가는 거니까. 매일 키를 재보면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오랜만에 키를 재면 어느새 훌쩍 커버린 걸 발견하게 되듯 부모의 사랑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왜 남들처럼 모성애가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그저 조금 느린 것일 뿐, 아이를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결국 엄마가 된다.


아이가 아팠던 날. 펄펄 끓는 아이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가며 제발 빨리 열이 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내가 이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라는 이름에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 '완벽한 엄마'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아직도 한참 자격미달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완벽한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잘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못난 모습,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는 게 진짜 사랑이라는 걸 아이들을 통해 배웠으니까.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낫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다만 친구의 고민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은데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거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어릴 때 사랑받지 못했어도 괜찮아. 그때 너는 불안한 시간을 홀로 견뎌야 했지만 지금은 너를 사랑해 주는 남편이 곁에 있고 너의 아이도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줄 거야. 어린 시절의 불행이 다 잊힐 만큼 아주 깊은 사랑으로 말이야."


하지만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뒤로한 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릴 땐 충분히 불안해할 만한 상황이었어. 지금까지 잘 버틴 것도 대단해. 진짜 잘해온 거야. 아이를 낳든 안 낳든, 앞으로도 넌 잘해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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