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유 없이 자주 아팠다. 생활기록부에도 "몸은 허약하나 당차고..."로시작하는 담임 선생님의 의견이적혀있을 만큼몸이 약했다. 운동하는것도좋아하고 주 7일을뛰어노는데도 몸은 쉽사리 건강해지지 않았다.개근상을받아본 것도 12년 내내단한 번뿐이었다.
토요일만 되면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곤 했다.
"아무래도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네요."
그 말에 떠오른 건,아빠의 얼굴이었다.
아빠 앞에선 조심할 일 투성이었다. 계단을 오를 땐 발 뒤꿈치를 들고걸어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땐 뒷사람을 위해 슬리퍼를 거꾸로 벗어둬야 했다.밥을한 숟가락이라도 남기면 '네 침 묻은 더러운 밥, 누구 먹으라고 남기는 거냐'며 혼이 나고, 라면 끓일 때 물이 이 정도면 괜찮은지물어보면, 그동안 라면 물이 얼만큼인지도 모르고 먹기만 했냐며 생각 좀 하고 살라는 타박을 들어야 했다. 학교나 학원에서는 혼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집에만 오면사사건건 혼이 났다.남들은 집이 최고라던데 나는 그 반대였다.
초등학생 때였다. 아빠가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한 날이 있었는데(아마 감기나 눈병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베란다에서 친구들이 노는 걸 쳐다보다가 '잠깐만 나갔다와야지'라는 생각으로 몰래 나갔던 게 화근이 됐다. 그렇다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얼음땡이나 하며 뛰어논 게 다였는데, 아빠는 내가들어오는 걸 보더니 내 옷장에서 옷을 뭉텅이로 꺼내왔다. 그리고는 커다란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아빠, 잘못했어요! 다음부턴 절대 안 그럴게요!!"
그러나 성난 아빠의 가위질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가장 아끼던 오렌지색 체크무늬 바람막이를 잘라버리려 하자, 무릎까지 꿇고 제발 이 옷만은 자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굵은 눈물 방울이 무릎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나 아빠는 기어코 그 옷을 잘라버렸다. 자기 말을 거역한 대가를 똑똑히 기억하라는 듯이……. 꿰맬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길다랗게 잘라내고 나서야 가위를 내려놓았다. 그때였던 것 같다. 아빠에겐 복종만이 답이란 걸 알게 된 때가……. 반항 같은 건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린애가 무슨 스트레스를 그렇게 받냐며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다. 그앞에서 차마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삶은 '긴장'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어서, '편안함'이란 단어를 체감하기가쉽지 않다고…….
중학생 때 독특한 수학 선생님을 만났다. 무슨 수련을 한다고 하셨는데 옷도 늘 개량한복 차림이었다.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치 수련원에 온 듯한 느낌이들었다.명상이나氣에 대한 얘기도 자주 해주시곤 했다. 선생님께서 해주신 얘기 중에 인상 깊었던 말이 하나 있다.
"너희들, 사람이 왜 아픈 줄 아니? 사랑이 필요해서 그런 거야.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잘 안 낫는다? 그런데 누가 간호해 주면 약 안 먹어도 금방 나아."
그 후로 아플 때마다 이 말이떠올랐다. 내가 허약했던 건 '사랑받고 싶다'는 신호였을까 하고.
그때만 해도 배가 자주 아팠다. 불편한 느낌이 싸르르르 이어지는데 화장실에 가봐도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배를 움켜쥐고 끙끙대고 있으면 할머니가배를 둥글게 쓸어주시기도 했다.
"여자는 배가 따뜻해야 해. 찬 데 앉으면 못 써."
배를 만지는 할머니의 손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따스한 온기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누운 채로 할머니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차분히 내려앉은 눈썹과 부드러운 눈빛이, 손녀를 걱정하는 여느 할머니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할머니는 날 위해 기도도해주셨다. '배가 나아지게 해 주세요'라고 시작된 기도는 '우리 혜원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사귀게 해 주세요, 어딜 가서 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기도로 이어졌다.
그때 그 밤이 내가 체감했던 '편안함'이었다. 소중히 여겨지는 기분…….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런 게 사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머리맡에서 나는 익숙한 베개 향과 이불의 묵직한 무게감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신기했다. 처음으로 우리 집이 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데도 졸음이 쏟아졌다. 할머니도 졸음을 이기기가 힘들었는지 기도소리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어느새 아픈 배도 잊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밤새 사랑을 채운 덕분이었는지, 다음 날 아침엔 배가 깨끗이 나아 있었다.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현관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할머니의 잔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밥을 이렇게 다 남기면 어떡해!"
"학교 늦어서 안 돼요! 지금 나가야 돼."
귀찮기만 하던 할머니의 잔소리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리 싫지 않았다. 평소엔 대상을 지칭하지 않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던 내가 그날은 이렇게 인사했다.
"할머니! 학교 다녀올게요!"
둘째 아이의 배를 쓸어주다가, 잊고 지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