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도대체 여긴 어디? 난 누구?
"아무리 그래도 좀 빠르다....진짜 마음 굳힌거야?"
"근데 왜? 아직 수습도 안끝났잖아"
"연차 까고 나가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퇴사를 결심하고 말을 했을 때, 많은 염려와 걱정을 받았고 그 때마다 수습이는 당연히 왜 회사를 떠나고 싶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당연한거죠. 주변 사람들이 해준 걱정은 지극히도 합리적인 걱정이고, 그걸 퇴사 당사자인 수습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장 수습이 본인도 누가 퇴사한다 하면 저 말 그대로 하지 않았을까요?
퇴사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따로 글을 파서 풀 예정이지만 "왜 그렇게 빨리 나가냐"에 대한 답은
결국 회계사 본업을 해보고 싶어서 입니다.
'도전해보고 싶어서 '
'로컬도 한번 가볼 생각이었으니까...'
'만약 이도 저도 안되면 그냥 돌아가서 죽은듯이 지내지 뭐...'
마음이 무슨 폭풍우 치는 밤바다 마냥 하루 걸러 하루 요동쳤었는데 미사여구 다 잘라내면 저 말 딱 하나 남더라구요.
회계사 자격증 따놓고 회계사 본업을 해보고 싶어서는 도대체 무슨 소리냐 하시는 분들이 많을텐데, 수습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알려면 태엽을 2022년까지 쭉쭉 감을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입사 준비를 함께 했던 수습이의 고정 산책로(2022년 6월))
2022년 여름, 회게사도 땄겠다, 파트도 끝났겠다, 학교도 졸업하겠다 이제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고 생각한 수습이는 백수 탈출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2022년도에도 회계업계 시장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짜 바닥중에 바닥처럼 보이는 올해는 아니라 그래도 대부분의 인원이 Big 4에서 스타트를 할 수 있었죠. 올해는 빅4에 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지만 2022년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수습이를 포함한 입사 준비생들은 Big4는 어지간하면 당연히 가겠지 싶었고, 그 중에서 '어디를 갈지'까지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전통적인 Big4 회계법인의 공채 원서 접수 시즌은 7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6월 마지막주 일요일(2차 시험 종료일)의 다음날부터 시작인데 편의상 6월 마지막날 끝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최종합격 이후 좀 쉬다가 입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편하겠지만, 합격을 자신하는 동차생이나 저유생들은 시험이 끝났다고 해서 놀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원서접수가 시작되거든요(물론 마음이야 시험칠 때 보단 더할 나위없이 편하겠지만 말입니다)
합격해놓고 남은 학교생활을 즐기며 여행과 친구들과의 시간으로 보내던 5월을 지나, 어느덧 수습이도 이제 더 이상 입사 준비를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다가왔습니다. 물론 노는거야 놀 수 있지만 이제 좀 진지해져야 하는 시간이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자소서와 면접준비, 동기와의 면접 스터디에 투자하기 시작합니다.
하루가 입사준비 - 산책 - 입사준비 - 운동 - 술의 아주 탄탄한? 루틴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렇게 치열했던 7월을 지나 7월 말~ 8월 초 정도까지 Big4의 면접은 대부분 끝이 나고,
8월 중순~말에 Big 4 회계법인들은 합격자 발표를 하기 시작합니다(물론 더 일찍 발표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수습이는 네 군데 중 2군데는 붙고 2 군데는 떨어졌죠.
아쉬움을 뒤로하고 입사를 결정하고 나니, 수습이는 회사로부터 가고 싶어하는 본부를 총 3개 쓸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게 정시 전형 마냥 1지망, 2지망, 3지망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나열하라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본부 소개 영상을 듣고 적어서 낼 수 있는 시간까지 새로운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게 되죠.
왜냐면 수습이는 제일 가고 싶은 본부 한 개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거든요. 다 그게 그거인 것 처럼 보이고 원래 성격이 많은 대체안을 두고 오래 고민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원래는 그 본부 1개 말고 나머지 두 칸은 빈칸으로 낼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근데 초반부터 그렇게 했다가 회사한테 찍힐까봐(원래 신입사원은 아무것도 아닌 행동 하나에도 벌벌 떠는 법입니다...ㅠ) 뭐라고 적어야겠다 싶긴 했죠.
마지막 칸은 진짜 아무거나 적어넣고 두 번째 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수습이는 약속시간이 되어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이 이야기를 하게 되죠. 어차피 백수탈출은 확정이니 이내 남자애들은 낄낄거리면서 소개영상을 다시 한번 보다가 IT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영상을 보게 됩니다.
"전산감사, 속칭 IT감사라고 부르는 이 본부는 회계법인에 요구되는 IT 전문성에 발맞추어....(이하 중략)"
'IT감사라....'
수습이가 IT감사라는게 뭔지 고민하고 있을 찰나, 친구는 차라리 쓸 곳이 없으면 저런 곳이라도 쓰라고 제안했습니다. 요새 문과도 IT 알아야 되는 세상 아니냐며 저 본부는 회계사 일도 하고 저런 IT 관련 업무도 하는 본부면 성장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논리죠.
술기운에 돌아가고 있는 머리지만 수습이는 저 논리가 퍽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우선 비중은 크지 않지만 대충 회계감사 과목에서 컴퓨터가 어쩌고 하는 내용은 있었던 것 같긴 하거든요. 그리고 구글 뉴스에서 이것 저것 찾아볼 때 회계법인에서 확대되고 있는 IT에 대한 부분도 지나가면서 잠깐 잠깐 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새 문과도 IT 알아야 되는 세상 아니냐'라는 말에 큰 공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문과 출신이라 좀 부담없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문과는 전문성이라는 걸 어필하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개개인의 노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전문성을 어필할 수 없는 분야라는 건 세상에 없죠.
"그래? 그러면 회계사 일도 하고 IT감사인지 뭔지도 하는 회계사가 되면 되겠네. 둘 다 하면 되는거 아냐?"
아무것도 모르면서 덜컥 그런데 가게 되면 그게 되겠냐는 걱정스런 물음도 받았지만 수습이는 신경도 안썼습니다. 어차피 1순위 말고는 다 똑같다고 여겨지는 마당에 이런 일에 시간 길게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냥 빨리 치워버리고 입사 전의 기간을 최대한 즐기고 싶었고, 술자리의 분위기에 빠져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르겠다...1지망 되겠지' 라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근거 하나 없는 말도 안되는 자신감이 차오르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어쩌면 제 첫 커리어를 좌우했을 지도 모르는 선택은 소주잔이라는 우선순위를 이기지 못하고 3분만에 의식의 저편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약 3주뒤, 입사를 3일 앞둔 시점에서 저는 '알바노' 마인드의 처절한 결과물을 마주하게 되죠
"OOO 회계사님, OO 본부에서의 새 출발을 환영합니다"
수습이는 X됐다 싶었습니다. 저 문장의 빈 칸에는 생각 없는 본부 중에서도 제일 생각이 없었던, 소주잔에 털어 넘겨버리고 그 뒤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본부가 쓰여 있었거든요.
입사하고 6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3개의 빈 칸중에 어디에 적든 저 본부를 적는 순간 무조건 끌려간다고 합니다. 수습이는 순진하게도 진짜 고등학교 지원하는 것 마냥 뽑기라고 생각했고, 수습이가 아무 생각없이 소주를 먹고 있는 그 순간에 사실 미래는 정해져 있었던거죠.
그렇게 수습이의 첫 커리어는 이탈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탈선의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소주잔과 함께 3분만에 말이죠.
처음 제 커리어를 들으시는 분들은 항상 이것에 대해 스몰토크 삼아 '무언가 원대한 꿈을 목표로 가셨냐'. '아니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셨냐', '원래부터 IT에 관심이 있었냐'라고 여쭤보시곤 합니다. 심지어 이건 입사 후에 수습이가 임원한테 들었던 질문이기도 해요.
차마 쪽팔려서 말은 못했지만, 수습이는 별 생각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어쩌다 태어났으니 인생을 한 번 살아보는 것 처럼, 수습이는 정말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단아의 길은 원래 어처구니 없게 시작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