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의 약속어음
그 사람이 쓰는 말이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후 4개월 때부터 두 돌 앞둔 지금까지 우리 둘째를 함께 키우고 있는 베이비시터가 있다. 일주일에 세 번 ‘임모’ 오는 소리에 아기는 쏜살같이 달려가 현관 중문을 연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없다. 둘 중 어린 축이 아직 세 글자 말하기가 어려워 ‘주세요’는 ‘주세’로, ‘고마워’는 ‘고마’로 말하긴 해도, 그 우정만큼은 막힌 데 없이 통쾌하고 아름답다.
시터가 퇴근해 제 아들과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단다. 열 살 아들이 아직 불판에 올라있는 고등어를 졸랐고, 그녀는 자기 어깨 높이만큼이나 되는 녀석을 힐끗 돌아보며 ‘기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등 교육을 받고, 자녀 학습지도까지 하는 반듯하고 야무진 그녀가 그녀의 일, 그녀가 책임을 갖고 정성을 들이는 그 일로 인해 사전에도 없는 유아어를 구사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가 쓰는 말이 그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 사람이 쓰는 말이 그가 지향하는 바를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 이것은 앞 문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다. 어떤 말이 어떤 상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현재의 상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누군가 고독하다 말할 때 기실 그렇다는 말인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뜻인지, 그래서 좀 도와 달라는 얘긴지 우리는 유심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대화라는 걸 하기 시작한 우리집 만 2세를 주목해본다. 엄마인 내가 가장 자주했던 말은 단연코 ‘맘마, 응가, 옳지’일 것이다. 마음의 소리까지 다 포함하면 ‘안돼, 위험해, 빨리’겠지만, 그 소리가 세상에 태어나 나를 규정하는 말로 활개치고 다니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참고 참은 결과다. 덕분인지 아이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오치’와 ‘머찌아’이다. 앞서 말했듯 세 글자 발음하기가 난감인 가운데 디귿 초성쯤은 조금 떼먹긴 했어도 그 눈빛과 달뜬 음성만큼은 완벽하게 “우와, 멋지아!”하는 것이다.
자존감과 회복탄력성이 높고, 행불행의 시금석이 오로지 자신에게 있으며, 몹시 우호적이고 제한된 관계 안에서 지내는 아이의 경우 실존하는 바와 지향하는 바가 상충하지 않는다.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하는 자의 담백함이랄까. 눈치 보며 계산할 필요 없고, 쓸데없이 말부터 앞설 필요 없는 정연함이랄까.
올 한 해 내가 글에서 가장 자주 썼던 표현은 ‘가지런하다’인 것 같다. 멋지다, 옳다, 바람직하다는 말로 뻔뻔함을 무릅쓸 수 없었기에 슬그머니 이 단어 뒤로 숨곤 했다. 더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옴찍거리며 미적지근하게 웃어 보이면 대개 큰 싸움없이 맺음 문장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옳다, 뒤에는 그르다가 있고, 바람직하다, 뒤에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가 있어서 시비가 일고 옹심이 들고 허무가 밀려 오기도 한다. 어느 열성 독자와 말다툼이라도 했다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주저하게 되더란 것이다.
이보다 더 합당할 순 없다는 듯 쾅쾅 글자를 새겨 넣었다가 세 번 읽고 네 번 읽으면서 살살 그 부분을 도려내기 일쑤였다. 목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바닥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는 자그만 끌 같은 걸로 한때 의기양양했던 단어들을 긁어내는 모습이라니. 마치 대학가 주점 벽지에 ‘철수와 영희, 우리 사랑 영원하자’던 낙서가 다음 계절에 와보니 이름 부분에 황칠이 돼있는 것만큼이나 겸연쩍다.
게다가 퇴고가 마무리되는 시간은 대개 자정을 넘겼을 때다. 일찍 잠든 아이들과 막 자러 들어간 남편으로 인해 고요와 적막이 갑절로 걸쭉한 때. 달 위를 걷는 우주인처럼 움직임마다 묵직하고도 예리한 긴장을 매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진짜 마지막으로 이것만 더 살피는 그런 시간 말이다. 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재촉하듯 깜빡이는 커서에서 잠시 눈을 떼 본다. 찬 바람 들치는 곳 없이, 주리거나 더부룩하지 않고, 지겹지도 낯설지도 않게 딱 편안한 풍경들. 반질거리는 나무 바닥에 적당히 어질러진 장난감조차 제자리를 찾아 누운 듯 자연스럽다. 이 평화가 안달나게 좋아서 나는 내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가지런함으로 상정하고 만다. 뭔갈 두루뭉술 에두르려 한다거나 어린양을 떤다거나 고상하게 들릴 법한 말을 궁리해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까, 가끔씩 찰나로 맛보는 그 경지가 몹시 감질나서, 마치 집안 곳곳 금연하겠다는 각서를 써 붙인 골초마냥 그 말을 수시로 적어보는 것이다.
내 말과 글이 지향하는 대로 내 업과 삶이 실존한다면 글 같은 건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리라. 알맞게 먹고 정갈히 씻어 엎어 둔 밥그릇이 그날의 일기를 능히 대신하고, 삼가한 행동과 반성들이 고해기도를 무용하게 만들 것이다. 진정한 마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니 편지는 거추장스러울 뿐이고, 하트나 웃는 얼굴 같은 이모티콘을 덕지덕지 붙인 문자메시지도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써야 한다. 한참 써야 한다. 아직도 종종 선 채로 저녁을 헤치우는, 폴짝폴짝 뛰기도, 앓는 소리하며 드러눕기도 잘하는, 근심과 기대가 들쭉날쭉 꿈길을 어지럽히는, 제 가슴을 퍽퍽 소리 나게 두들겼다가 또 고만고만한 일로 감격하여 목이 메는 나는, 글이라도 많이 써서 내 지향하는 바를 약속어음처럼 남겨야 한다. 글에 부끄럽지 않은 실존이 되고자, 글이 인도하는 지향을 얻고자 내 눈 닿는 곳, 남의 눈 닿는 곳에까지 써 붙여 둬야 한다.
최근 모 문예지에 실린 스승님의 글에는 언제나처럼 겸허함이 켜켜이 들어차 있다. 성정이 그러하신 즉 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다양한 것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나도 또 한 번, 나를 별 수없이 홀딱 드러내 보인 글 한 편을 마무리 짓는다. 이 글이 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줄 징검돌 하나가 돼 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