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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혹박 Apr 11. 2021

6장. 사장님 나빠요.

모든 사장님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  앉아 보실래요제가 그간 이틀  업무일지를 봤어요봤는데 보시다시피 일의 속도가 너무 느리네요한국에서의 경력도 있고 하셔서 최저시급보다 많이 드리기로 한 건데 이건 너무 기대 이하네요그런데도 2 정시 퇴근하셨네요저는 어제 8시까지 일했어요여기서도 한국처럼 일이 많으면 무보수로 야근도 하고 그래요한국 교민 자녀 2 중에도 무보수로라도 일하게  달라는 분들  섰어요어떻게 하실래요

 내가 학업을 한 2년 동안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앞서 잠깐 언급되었던 우리 이웃집 백인 남성, 로스는 하우스 페인터였다. 부부만 살고 있었는데 그 부부 모두가 주택 신축 공사 현장에서 페인트를 칠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로스가 말하기를 트레이시는 자신의 와이프가 아니라 동거녀(partner)라고 분명히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혼한 가정이 한국에 비해 무척 많을 뿐 아니라 동거하는 커플도 무척 많은데 이를 거리끼지 않는다.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아닌 동거하는 사이’라고 확실하게 알리는 것이 나는 오히려 우스웠다. 이 커플이 하우스 페인터라는 사실은 OO Painting이라고 적힌 승합차와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의 옷에 묻어 있던 페인트 자국들을 보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의외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로스에게 페인트 사업에 대해 물었고, 당신이 사장이라면 자신을 좀 고용해 줄 수 있겠느냐고도 물었다. 물론 비자 상태가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남편의 막일은 우리가 뉴질랜드에 온 지 채 두 달이 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만 일을 할 수가 있었는데 남편은 빠르게 일을 배워갔고, 영어회화 실력도 빠르게 늘어갔다. 


 몇 달 후 미성년 유학생 신분의 큰 아이의 보호자로서 있었던 남편의 가디언 비자 (Guardian Visa)로도 승인을 얻으면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 달 후 주 20시간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과 일확천금을 쫓느라 현재가 불행한 청년이었던 남편은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드디어 재능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일한 만큼 색깔로 채워지는 것에서 보람마저도 느껴진다고 했다. 남편이 즐거워하는 것과 통장에 돈이 쌓이지는 않아도 식비를 충당할 만큼의 주급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했던 만큼 이웃집 로스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로스와 트레이시에게는 각각 이전의 결혼으로부터 다 큰 성인 자녀들이 있었는데 손주들까지 모두 호주에서 살고 있고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에만 만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 커플은 우리 아이들을 손주 보듯이 귀여워했다. 우리 부부는 그들을 약간은 아니 사실 심각하게 은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 사람 조심해.” 

빨강머리 앤의 수다스러운 얘기를 들어주는 다이애나처럼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얘기를 다 들어주는, 지금은 중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전화기 너머로 나의 뉴질랜드행 결심을 듣고 나와 우정을 쌓은 세월 동안 처음으로 나에게 충고를 했다. ‘에이, 얼마나 만나진 다고.’ 또는 ‘다칠 일이 뭐가 있겠어.’라고 웃어넘겼다. 이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마땅할까? 이 일은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졸업을 하고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의 8주간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생각만 해도 무거운 주제인 취업은 저만치 미뤄뒀었다. 아이들 방학이 끝나갈 때쯤 우리 집 근처의 도립병원에서 1년 계약직으로 회계직원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봤고, 다른 구인공고들과 함께 아이들 방학이 끝나자마자 하루에도 몇십 군데씩 이력서를 썼다. 이력서를 쓰면서도 면접 연락이 왔으면 하는 바람과 면접 연락이 올 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병원은 워낙 큰 조직이라 기대도 없었는데 전화가 왔다. 서류가 통과되어 면접 일정을 알리는 반갑고도 믿기지 않는 전화였다. 그날로 나는 면접 준비에 들어갔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수험 공부하듯이 열심히 준비하여 일주일 후 면접을 보러 갔다. 너무도 떨리는 마음을 상당히 잘 다스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어 나온 질문에 대한 답이 직전에 내가 했던 답과 겹치는 바람에 다른 사례를 찾는 데 애를 먹고 결국 나 자신조차 만족스럽지 못한 채로 면접장을 나왔다. 일주일 안에 이메일로 결과가 갈 거라고 한 것과 달리 일주일이 지나도 이메일은 오지 않았고, 열흘째에 전화가 왔다. 병원이라고 하는 순간, 나는 ‘합격인가?’ 기대했었다. 전화가 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불합격의 소식을 그토록 따뜻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서 알려준 것이 고맙기도 했고 야속하기도 했다. ‘어쨌든 고마워’라고 말할 수밖에.


 하루에도 몇 군데씩 이력서를 보내는 것을 쉬지 않고 하고 있는데 면접 연락이 오는 데는 없었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경제 봉쇄 (Lock Down) 령이 내려졌다. 아이들과 남편과 5주를 함께 집 안에만 갇혀 지냈는데 행복했다. 이력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핑곗거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가 심각한데 나만 이리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내 마음은 홀가분했다. 5주 후 몇 주에 걸쳐 다시 모든 것이 원상 복귀되었을 때는 또 아이들의 중간 방학 (Term Break라고 하는데 1년을 4 Term으로 나누고 Term 1과 Term 2 사이, Term 3과 Term 4 사이에 각각 2주간의 방학이 있고, Term 2가 끝나면 2주간의 겨울 방학, Term 4가 끝나면 8주간의 여름방학이 있다.)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이력서 쓰기를 아이들 중간 방학 끝난 후로 미뤘다. 그런 핑계라도 있는 게 내심 좋았다. 그렇게도 나에게는 구직의 부담이 컸던 것 같다. 


 그다음 3개월을 또 이력서 쓰기와 아이들 방학 패턴을 반복하던 중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렇게 또 아이들 방학이 끝나가던 때에 딱 두 개 있던 한국식품점 중 하나가 폐업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폐점 소식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폐업 세일을 할 거라는 희소식도 있었다. 그 소식은 지역 한인 커뮤니티에 올려져 있다는 얘기를 들은 나는 남편에게 전했고, 남편은 즉시 그 커뮤니티에 접속하였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 25% 세일한다네? 그런데 그 회계사무소 있잖아. 거기서 사람 뽑는다네?”

남편은 무심한 듯 얘기했고, 나도 무심한 듯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모든 시도를 남편에게 다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뉴질랜드에 와서 알게 되었다. 나는 마지막 학기 중 인턴 과정을 그 회계사무소에서 무사히 마쳤었다. 사업 번창해서 꼭 나를 뽑아달라고 나답지 않은 넉살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 그분에 대한 감사함도 매우 컸기 때문에 나는 연이은 이런 좋은 인연들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내가 인복이 많아서 일거라고 기복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되뇌기도 했었다. 


 나는 남편 모르게 은밀히 접촉을 시도했다. 그 회계사는 이미 내 이력을 알고 있기에 정식으로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원래 있던 그 직원이 이직을 하고 그 자리에 사람을 뽑는 것인지, 사업이 확장되어 인원을 충원하는 것인지가 더 궁금하기 했기에 연락을 직접 해봤다. 그 회계사는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얘기하자며 약속을 잡았다. 기존 직원이 이직을 하게 되어 공석이 생기게 되었는데 알다시피 파트타임 자리이고 나는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 정규직 (Full-time Job)이 필요할 것이니 나에게 그 일자리를 주기가 미안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나는 그가 그의 필요보다는 나의 처지까지 생각해주는 것 같아 감동했다. 

“제가 여기에서 살고 있는 목적이 영주권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이 곳에서 계속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영주권이 있다면야 좋겠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영주권을 목표로 한다고 해서 영주권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기에서 충분히 잘 살 자격이 갖춰지면 영주권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니 제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지 아닌지 보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회계사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 잘 살 자격을 갖추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거고요. 제 입장은 이러하니 회계사님 생각에 그 자리에 제가 잘 쓰일 것 같다고 판단되시면 절 채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며칠만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금요일까지는 연락드릴게요.”


 금요일, 다음 주 월요일부터 4시간씩 근무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집에는 지인들이 와 있었는데 그 소식을 함께 전해 듣고 나 대신 환호해주었다. 그리고 출근 전 주말엔 내 생일이 있었다. 남편은 내 생일을 기념하여 내가 좋아하는 연어를 남섬 (South Island. 뉴질랜드는 두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쪽에 있는 섬은 북섬, 남쪽에 있는 섬은 남섬이다.)에서 주문해 주었고, 우리 가족은 연어 파티를 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기분이 좋았는데 긴장도 한 것 같다. 출근 전 저녁, 맛있게 먹은 연어를 밤새 다 토한 것을 보니. 


 월요일 9시 반 출근을 위해 세심하게 시간 계획을 했다. 남편이 가장 먼저 집을 나가고, 나는 큰 아이를 8시 45분에 학교에 내려주고, 둘째를 9시에 유치원에 내려준 후 사무실 근처 주차할 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점점 우리 집과 가까워지기만 했다. 유치원과 회사와 우리 집은 거리가 꽤나 가까웠는데 차라리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9시 10분에 집 근처에 주차를 하고 20분 동안 거의 뛰다시피 해서 정확히 9시 30분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내일은 5분은 일찍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 안에는 회계사님 외에 아직 인수인계 중인 직원과 회계사님의 아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부가세 (부가가치세로 뉴질랜드에서는 GST라고 한다.) 마감기한이 코 앞인데 직원을 뽑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일을 배우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나도 뉴질랜드 회계 일은 초보이니 둘이 나눠하게 돼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인턴을 했던 것도 또 수개월 전이라 물어가며 더듬더듬 일을 익히는데 이 직원 분이 이번 주 인수인계를 끝내고 퇴사하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증이 생겼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방금 앉은 것 같았는데 어느덧 2시 퇴근 시간이 되었고,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아니 달려가는 시간 20분을 고려하면, 지금 서둘러 나가야 큰 아이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1분, 2분이 흘러가도록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뭔가 민망함이었다. 2시 7분이 되어 미안한 표정으로 퇴근했다. 내일은 운동화를 신겠노라고 다짐하며 달리고 달려 큰 아이 학교에 갔는데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간 후 아이들 몇 명만 선생님들과 주차장에 남아 있었는데 그 틈에서 아이를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아이가 저기서 웃고 있다는 반가움과 함께 첫 근무의 고단함이 끝이 났다는 안도감에서였다. 


 작은 아이는 원래 9시부터 2시까지 유치원에 있었다. 하루 4시간까지는 무료이고 4시간 이후부터는 시간당 8불(1 뉴질랜드 달러는 약 800원쯤 한다.)을 내야 한다. 내가 출근을 하게 되면서 1시간 더 연장하게 되었는데 오늘 생고생을 하고 나니 1시간이 아니라 2시간을 늘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가도 그렇게 되면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큰 아이도 방과 후 활동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15불이고, 유치원 2시간 연장에 16불을 쓰면 합이 31불인데, 큰 아이 학교 방학 내내 방과 후 활동비까지 계산하면 내 시급이 24불로 하루 4시간 일하는 것에 금전적으로는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첫날이라 힘들었을 것을 감안하면 시간이 흘러 적응이 되고 나면 더 연장하지 않아도 아이들 픽업에 크게 지장이 없을 거란 생각도 드는 한편, 이 일은 돈을 보고 한 것이 아니니 금전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할 것을 차차 생각해보자고 나를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육아와 가사가 있는 한 퇴근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긴장에서 온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집에 와서 아이들 씻는 것에 날카롭게 개입하는 것부터 저녁을 준비하고, 잠자리 의식을 치르는 데까지 불쑥불쑥 아이들과 남편으로의 화로 표출됐다.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끼며 수요일 아침 출근을 했는데, 회계사님이 자신의 자리로 나를 불렀다. 

여기  앉아 보실래요제가 그간 이틀  업무일지를 봤어요봤는데 일의 속도가 너무 느리네요한국에서의 경력도 있고 하셔서 최저 시급보다 많이 드리기로 한 건데 이건 너무 기대 이하네요그런데도 2 정시 퇴근하셨네요저는 어제 8시까지 일했어요여기서도 한국처럼 일이 많으면 무보수로 야근도 하고 그래요한국 교민 자녀 2 중에도 무보수로라도 일하게  달라는 분들  섰어요어떻게 하실래요?


 나는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다. 드라마에서 본 것도 같은 이 장면이 나에게 현실로 일어났다. 그 사람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분명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인데 고용계약서를 쓰기 전과 후가 어째서 그렇게 달라진 걸까? 내가 느리고 무능하다는 그 말이 사실인 것은 아닐까? 내가 꿇고 들어갔어야 옳았을까? 내가 별거 아닌 것에 노발대발한 것일까? 내가 그깟 자존심 때문에 대의를 놓친 것일까?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일까? 나는 아이들을, 생계를 생각하지 않은 철없는 엄마인 걸까? 나는 이 문제에서 한 달 동안이나 헤어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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