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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혹박 Apr 11. 2021

7장. 임시 거주증으로 산다는 것

이것이 비자 인생

 도대체 영주권이 뭐길래? 지금 나의 마음이 괴로운 것이 영주권 때문일까? 나는 여기에 영주권을 받기 위해 온 것일까? 지금 이 시국은 내가 영주권 받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지금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인가? 


 뉴질랜드는 미국이나 호주보다 비교적 이민이 쉽다고 알려져 있다. 이민의 뜻이 영주권 취득이라면, 뉴질랜드에 오지 않고도 기술이민을 신청하여 영주권을 취득하고 오는 분들도 꽤 있다. 그 외에 나처럼 뉴질랜드에 입국하여 학업을 먼저 하여 워크 비자를 득한 후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일의 컨디션에 따라 워크 비자가 연장될지, 말지 또는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결정된다. 워크 비자 연장 조건이나 영주권 신청 조건은 이민 정책에 따라 달라지며, 이 이민 정책은 꽤나 자주 바뀐다. 


 나의 경우 학생비자로 2년, 워크 비자로 2년 있는 중인데 그에 따라 나의 아이들의 신분도 학생비자와 동반비자를 오갔다. 내가 학생비자로 있던 시절에는 6개월짜리 어학연수 두 번, 1년짜리 회계학 코스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각각 비자를 6개월짜리, 6개월짜리, 1년짜리로 바꿔 신청해줘야 했고 큰 아이도 유학생으로서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학생비자가 필요했으며,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남편이 가디언 비자로 있었고, 작은 아이는 그에 딸린 동반 비자로 있었다. 내가 워크 비자를 받게 되자, 남편에게도 워크 비자가 나왔고, 큰 아이는 유학생 신분에서 내국인 학생으로 바뀌어 학비를 면제받는 학생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곧 만 5세가 될 작은 아이 역시 최근 학생비자를 신청해서 받았다. 


 이제 막 3년 거주했을 뿐인데 비자 작업을 총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를 모두 남편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물론 유학원을 통하고는 있었지만 남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작업이었다. 비용도 부담이지만 서류를 만들어보니 어쩐지 비굴함이 느껴진다는 것을 이번 둘째 아이의 학생 비자 서류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경제적, 심리적 부담에 더하여 비자가 때맞춰 나와주지 않았다가는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도 내재되어 있다. 비자서류에 2년마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첨부해야 해서 남편과 나는 각각 1회의 건강검진을 한 적이 있다. 남편은 혈압에서 커트라인에 걸려 3차례나 재검을 받아야만 했고, 한국인 여성의 경우 낮은 빈혈 수치의 문제로 비자 발급에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건강검진 결과가 나올때까지 불안에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점점 영주권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이는 잦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남편이 원하는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나의 제대로 된 취업 한 방이 필요했다. 


 나는 한인 회계사무소 사건으로 취업에 대한 의지를 잃었다. 좀 더 정확히는 방향을 선회했다고 해야겠다. 그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였다. 과연 내가 취업을 원하는가? 무엇을 위해 취업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그러려고 여기 온 거잖아. 니가 하자는 대로 할게. 니가 가자는 대로 갈게.”


 감사하게도 남편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 덕분에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일찍 잠든 대신 일찍 일어나 혼자 맞이하는 새벽의 3시간과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유치원에 가 있는 4시간. 이 시간들을 영어 공부하고 이력서 보내는 데 다 쓰고도 몇 달 동안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이 영어 공부의 능률을 떨어뜨리고, 매력적인 이력서를 작성하는 데 실패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년에 혹은 몇 년 안에 뭐가 되고 싶은가,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와 같은 불투명한 과제보다는 지금 뭘 하면 즐거울까를 고민하기로 작정했다. 일단 지금 당장 즐겁고 싶었다. 바닥에 처박힌 나의 기분을 끌어올려주고 싶었다. 뭘 해야 즐거울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나를 즐겁게 해 줄 일들을 적었다. 그러기 위해 노트를 하나 장만했는데 그걸 시작으로 단 두 달 만에 그 노트 한 권을 즐거운, 즐거울 일들을 구상하여 적은 것으로 가득 채웠다. 즐거운 것을 찾으려고 적다 보니, 미처 몰랐던 즐거울 만한 일들이 떠올랐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을 때 느껴졌던 즐거움을 또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 노트에는 보기에만 해도 즐거운 것들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일과로 하고 있는 즐거운 일들은 대충 이렇다. 감사일기, 영어 원서 필사, 독서, 글쓰기, 걷기, 명상, 요가, 영어 동영상 100번 보기, 반신욕. 이런 것들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기회가 되는 한 나의 주 5일을 돌려 막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내일 죽는 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할까? 가족들과 같이 맛있는 밥을 해서 먹고, 같은 공간에 있으되, 앞서 열거한 것들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지금 꽤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를 괴롭혔던 그 회계사 사건이 없었다면, 이 행복이 있었을까? 그건 필연이었을까? 그 사건은 남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회계사무소에서 다른 큰 상장사로 이직한 직원의 남편 역시 페인터였는데 젊어서 뉴질랜드에 왔지만 영어 울렁증이 있었고, 키위회사에서 일해 본 적이 없어서 키위 회사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코로나로 인하여 뉴질랜드가 첫 번째 경제봉쇄에 들어가기 직전 자신의 팀에 일감이 없다며, 나의 남편의 사장인 로스 (참으로 우연인 것이 그 직원과 남편의 사장은 이웃이었다.)에게 며칠간 일을 할 수 있는지 연락해왔고, 그리하여 남편의 팀에서 며칠 동안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내가 그 회계사무소에 취업이 되어 갔을 때, 그 직원은 자신의 남편 팀에서 내 남편을 스카우트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내 남편에게 전했고, 그가 옮기겠다고 결정하기를 바랐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은인으로 생각해왔던 로스는 사적으로는 키위답지 않게 인정이 많은 고마운 사람이지만, 현장에서는 성마르고 직원들에게 심지어 자신의 파트너인 트레이시에게도 기분에 따라 함부로 말하는 사람임을 점차 알게 되면서 남편이 상처를 입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더욱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열심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 상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스카우트 제의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남편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이직하기로 했고, 지금은 심성 좋은 한국인들과 한 팀이 되어 쉬는 시간에 수다도 떨고, 회식도 하고, 야유회도 가는 것에 만족해하며 일하고 있다. 


 그래도 남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로스를 떠난 것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지인 가족들 여럿이서 작은 놀이터가 딸린 정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큰 아이와 큰 아이 또래의 아이와 함께 온실 구경을 다녀온 사이 남편은 놀이터에서 로스와 함께 같이 일했던 동료를 만났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옆 현장에 로스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남편은 안부 인사를 하러 갔다. 로스는 남편을 이직 후 처음으로 본 것이었는데 인사는커녕 대뜸 남편이 놀이터에서 자신의 직원이랑 만난 이후 그 직원이 시급을 올려주지 않으면 나가겠다고 했다면서 남편 때문에 자신이 골치 아파졌다며 볼멘소리를 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길로 미안함이 싹 날아갔다고 했다. 


 나와 남편의 지금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조차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이 영주권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을 때의 형편없었던 행복 지수를 생각하면 지금 나와 내 남편이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잘 살고 있고, 아이들도 따뜻한 선생님들과 순박한 친구들과 함께 세상 가장 즐겁다는 뉴질랜드 학교 생활을 하고 있고, 워크 비자로도 아이들 무상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이 모든 혜택을 누린 후 비자 만기가 되어 뉴질랜드를 떠나게 된다 한들 무슨 미련이 있겠나. 나는 이미 뉴질랜드와 작별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날아갈 것만큼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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