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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혹박 Apr 11. 2021

8장. 이민병이 가고 향수병이 오다

이 와중에 영어 울렁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어학 과정이 시작되고 첫 주제가 문화 적응(Acculturation)이었다. 그것을 주제로 한 글도 여럿 읽었고, 토론도 했고, 과제로 에세이도 썼다. 그 글들에서 용어 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주민의 문화 적응 과정은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1단계: 신혼여행(Honeymoon), 2단계: 좌절 또는 문화 충격(Frustration or Culture Shock), 3단계: 회복(Recovery), 4단계: 문화 적응(Acculturation). 그 당시 나는 토론 파트너에게 나는 허니문 단계에 있다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학원 첫 학기 약 6개월의 기간 동안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곧 2단계와 3단계를 거쳐 빠르게 4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다음 6개월을 어학원의 마지막 레벨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나는 같은 반 아이에게 지금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적응이 완료된 상태인 것 같다고 답했다. 뉴질랜드에 온 지 8개월 정도 되었다고 했던 친구였다. 나는 그때 내 상태가 2단계 좌절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지금쯤이면 완전히 적응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암흑의 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학 최고 단계에 온 이상 영어를 배우러 갈 곳이 더 이상 없는데 나의 영어 구사 능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큰 아이는 만 5세가 되어 뉴질랜드에 왔는데 유치원에서 배운 알파벳이 전부였다. 아이는 너무 어려서 환경이 바뀌었다는 점에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누가 그랬다. 이민 오면 아이들은 문제없다고. 부모가 문제지. 큰 아이가 학교를 다닌 지 한 달쯤 됐을 때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나 다시 아기가 된 것 같아.”

그런데 그 말에 슬픔이나 우울, 화남 그런 것들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그러하다는 느낌만이 담백하게 들어 있었다. 큰 아이는 그렇게 다시 아기가 된 것처럼 모든 새로운 것들을 빠르게 흡수했다. 저항도, 거부감도 없었다. 지금 큰 아이는 선생님의 지도를 막힘 없이 따라가고, 친한 친구들이 생겨 초대도 하고 초대도 받으며 아주 잘 적응했다. 그러나 최근에 큰 아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한국말을 영어보다 훨씬 잘하는 것 같아.”

자신의 영어가 자신의 사고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함에 있어서도 그저 받아들임 말고는 다른 감정이나 평가는 없었다. 이것 때문에 내가 졌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영어를 못하고,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다고 느껴졌던 순간들에서 절망감을 느꼈고, 그것들이 쌓여 강한 저항을 만들어냈다. 낯선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도 강했다.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관용구 (Idiom)가 왜 이리 많냐’고 투덜댔고, ‘라테이든 라떼이든 왜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다’고 집에 와서 화를 내며 혼잣말했고, ‘하이 (Hi)만 하지 왜 하와유 (How are you?) 하는 거야, 궁금하지도 않으면서’라고 생각하며 “굿 (Good)”이라고 늘 같은 대답만 했고, 얼굴 전체를 문신으로 덮은 마오리 아저씨를 보고는 얼어붙었고, 딸기는 왜 이렇게 뻣뻣하고 건조하냐고 말하면서도 매번 그 새빨간 색에 매료되어 사와 놓고는 후회했고, 여기 과자는 너무 짜다고 말하면서도 입에 한 움큼 넣고는 그치지 않고 소금과 비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어떻게 된 게 섬나라가 바다가 삼면밖에 안 되는 한국보다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 적다며 영국인의 음식 문화를 폄하했고, 아보카도랑 단호박은 왜 한국보다 싸지 않은 지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막장 토론을 했고, 2주에 한 번은 깎아야 하는 잔디는 고용 창출을 위한 것이냐고 투덜댔고, 시내 2시간 무료 주차 단속을 위해 단속원들이 발 품 팔아 무작위로 2시간 초과 차량을 찾아내는 시스템은 너무 바보 같지 않냐며 비웃었고, 여름이 되면 한 시간을 저축했다가 겨울이 되면 한 시간을 찾아 쓰는 우스꽝스러운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며 1년에 두 번씩 집에 있는 3개의 벽시계와 3개의 손목시계를 조정해야 하는 것을 몸서리치게 귀찮아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 문화에 적응하기란, 영어를 빠르게 흡수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뉴질랜드에 드디어 옴'으로써 이민병은 고쳐졌으나 비교병이 생기고 만 것이다. 끊임없이 뉴질랜드와 한국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영어와 한국어를 비교하고 있었고, 뉴질랜드에 사는 수많은 인종과 한국인을 비교했고, 뉴질랜드 사회 시스템과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비교했고, 코로나 방역과 대응에 대해서도 뉴질랜드 정부와 한국 정부를 비교하였다. 나는 그동안 본 적이 없었던 것, 낯 선 것,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여기고 열등한 것이라고 어느새 결론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화의 습득을 거부했다. 여우의 신 포도라고 내가 가지지 못한 뉴질랜드는 항상 한국보다 아래에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향수병도 함께 얻었다. 당초 금의환향을 꿈꾸며, 영주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외 취업에 성공하기 전에는 한국에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했었다. 남편에게 입 밖으로는 '나는 성공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론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선자였다. 한국에 대한 추억과 조부모와 사촌들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지고 있던 큰 아이는 뉴질랜드에 온 이후로 ‘한국에 언제 놀러 가?’ 하는 질문을 자주 했었고, 나는 항상 ‘나중에’라고 답했었다. 


 졸업을 하고 2년이 넘어가니 나도 이제 한국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2020년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지내자며 연초 계획을 세우면서 온 가족이 기뻐했다. 코로나 사태가 생각지도 못하게 길어져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니(뉴질랜드는 영주권자 이상의 자국민만 입국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임시 거주증을 소지한 우리의 경우 한국에 가는 경우 다시 뉴질랜드로 들어올 수가 없다.) 갈 수 있었는데도 안 갔던 때와는 다르게 한국이 더 애절하게 그리웠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새로 태어난 조카들도, 친구들도 보고 싶고, 한국 음식도 먹고 싶고 심지어 만원 지하철도 타고 싶어 졌다. 그럴수록 비교병도 더 심각해졌다. 내가 이런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것을 뉴질랜드를 떠나 어쩌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선택지가 생기고 나서야 알았다.


 취업에 실패한 김에 조금은 즐겨보자 하는 생각에 현재 재미있는 일들만 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영주권으로 가는 길과는 멀어질 것이고 비자 기간이 만료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자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비자 만기까지만 뉴질랜드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의미 있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이 곳에 대해 배우고 느끼고 싶어 졌다. 지금 하는 일도 즐겁고, 앞으로 있을 일을 상상만 해도 즐겁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어떤 독자 분들은 내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한심한 사람아, 밥은 먹고살아야지. 아이들은 어찌 키우려고.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스무 살이 된 이후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그러니까 20년 동안 그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만족스러울만한 답을 아직 얻지 못했다. 언제나 부족하고 언제나 불안했다. 그래서 이번엔 노선을 바꾸어 당분간 그 고민을 안 하고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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